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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ge M May 21. 2020

[토요 호러가이드]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일

영화 <퍼스널 쇼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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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인 김혜민



외면받아 숨기고만 있던 취향, 매주 하나씩 <호러 상자>를 열어보자.


이 영화를 '토요 호러가이드'에 올려도 될까 고민을 꽤 많이 했다. 토요 호러가이드가 아니라 되는 때 하는 호러 가이드가 됐지만 나는 보통 금요일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영화 세 편 정도를 보고 어떤 걸 소개할지 고민한다.


영화가 정해졌다고 해서 이야기가 쉬운 건 아니다.  주변에서 ‘호러 한정이면 소개할 영화가 너무 적지 않냐’는 우려에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 소개하면 되지!’ 라고 답한 걸 뼛속 깊이 후회하고 있다. 나야 정신 나간 좀비 무리가 내장 뜯어먹는 걸 1시간 30분 동안 볼 수 있지만 그걸 대체 뭐라고 소개하나, 이야기를 푼다고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가 방대한 영화를 고르면 이게 호러의 범주에 드나? 하는 고민이 든다. 실제로 <퍼스널 쇼퍼>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호러나 스릴러를 메인으로 하던 감독도 아니고 "이 영화의 장르는 뭐냐"는 질문에 "스릴러나 공포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감독은 주인공 ‘모린’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장르적 요소를 끌어왔다지만 아무튼 모린은 영매고 귀신이 나와 심령체를 뱉어내니 대충 호러라고 하자. 서스펜스라고 생각해도 굉장히 훌륭한영화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도 서스펜스로 분류되는 영화가 많으니, 스릴러와 서스펜스도 호러의 한 장르 아니겠는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누구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SNS를 하는 지금, <서치>나 <언프렌디드:친구삭제> 등 전자기기나 온라인 소통이 호러/스릴러 영화의 메인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관객 일상에도 밀접하게 연관된 주제니 긴장감을 고조하기에도 좋고 별다른 장치가 필요하지 않아 예산을 아끼기에도 좋다. <퍼스널 쇼퍼>에서 관객의 집중을 끌어내는 건 모린이 정체불명의 발신자와 나누는 문자다.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모린.


모린은 3개월 전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잃었다. 이 둘은 모두 영매로, 생전 한쪽이 먼저 죽으면 반드시 신호를 주자고 약속했다. 모린은 루이스가 죽은 파리에 머물며 루이스가 보낼 신호를 기다린다.
             

▲모린은 심령 현상을 겪지만 확신하진 못한다.


며칠 밤을 루이스의 집에서 보내지만, 신호라고 할 만한 현상은 죄다 너무 약하다. 기껏해야 수도꼭지를 틀고 여기저기 칼집을 내놓는 정도다. “더 확실한 걸 보여줘”라며 혼란스러워하는 모린은 루이스의 집에서 유령을 목격한다. 심령체를 뱉어내고 사라진 유령은 루이스가 아니다. 모린이 이제 그 집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옷을 쇼핑할 시간이 없는 키라를 위해 대신 어울릴 옷을 구해주는 모린.


모린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파리에서 지내기 위해 퍼스널 쇼퍼 일을 한다. 모린의 고용주 ‘키라’는 업계에서도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모린은 키라를 위해 샤넬, 까르띠에 등 온갖 명품관과 편집숍을 돌아다니며 옷과 악세서리를 나른다.

         

▲모린은 키라가 입어볼 옷을 대신 피팅하지는 않는다. 악세서리 정도를 걸쳐볼 뿐.


키라의 옷장에는 에르메스부터 프라다까지 명품이 가득 들어차 있다. 모린은 키라에게 어울릴지 옷을 자신에게 대보고 거울에 비춰보긴 하지만 입어보진 않는다. 촬영 전 대타를 해 주거나 옷 사이즈를 맞춰볼 정도로 체형이 비슷함에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 키라가 모린이 먼저 옷을 입어보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모린은 관계자에게 함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 신발 한 켤레를 얻는 게 전부다.
  

▲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하는 낯선 이와 나누는 문자,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력도 한 몫 한다.



▲발신자에게 루이스냐고 물은 뒤 모린은 크게 동요한다.


루이스에게 이렇다 할 신호도 받지 못하고, 퍼스널 쇼퍼 일에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모린은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때 모린은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문자를 받는다. ‘난 널 알아’, ‘너도 날 알고’. 누가 보냈는지도 모를 찝찝한 문자야 무시하면 될 것을 모린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 문자를 보낸 건 루이스일까? 모린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동요한다.
             

▲금기 없이는 욕망도 없지.


▲키라의 침대, 키라의 옷. 모린은 자기 욕망을 마주하고 분출한다.


모린은 정체불명의 발신자와 문자를 나누며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다. ‘금기 없이는 욕망도 없지’라는 문자 이후 모린은 키라의 집에 들어가 입어보고 싶던 옷을 입고 키라의 침대 위에서 자위를 한다. 평생을 남의 대타처럼 살던 모린의 욕구가 밖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삐빅- 살인범입니다.


영화는 내내 애매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문자를 발신한 사람만큼은 확실하게 한다. 키라의 내연남 잉고다. 잉고는 키라가 헤어지자고 말하자 살인을 저지른다. 모린을 호텔로 불러낸 뒤 그 방을 빠져나가다 경찰에 검거된 잉고는 범죄를 자백하고 용의 선상에 올랐던 모린은 출국 금지가 해제된다. 모린은 모든 걸 두고 연인인 게리가 있는 오만으로 떠나기로 한다.

             

▲모린의 뒤를 잘 보면 낯선 남자가 유리컵을 들고 있는 게 보인다


재미있게도 영화가 영적 존재를 보여주는 장면과 루이스가 진짜 신호를 보내는 때는 모린이 루이스의 신호와 영적 존재, 자기 일에 관한 모든 걸 버린 이후다. 잉고가 빠져나가기 전 호텔 엘리베이터와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지만 화면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루이스는 모린이 오만으로 떠나기 직전 친구의 집에 머물 때 신호를 보낸다. 모린은 보지 못 하지만 영화에 등장한 적 없던 남자가 지나가고, 허공에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진다. 모린은 그걸 루이스가 보낸 신호가 아니라 사고라고 여긴다.
             

▲루이스냐는 질문에 벽이 한번 울린다. 모린은 안식을 찾았냐고 묻고 영적 존재는 다시 벽을 친다.


그리고 오만에서 모린은 다시 영적 존재와 마주한다. 모린은 숙소에서 허공을 떠다니던 유리잔이 깨지는 걸 목격한다. 대답이 ‘예’면 한 번, ‘아니오’면 두 번 테이블을 흔드는 식으로 영적 존재와 소통했다던 빅토르 위고를 떠올리며 모린은 영적 존재에게 질문을 던진다. “루이스, 여기 있어?” 벽이 한번 크게 요동치고 몇 개의 질문 끝에 모린은 방 안에 있는 존재가 루이스가 아님을 직감한다.
             


모린은 다시 묻는다. “루이스, 너야?” 방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아니면, 나?” 벽이 다시 큰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모린의 묘한 표정과 한숨을 끝으로 영화는 끝난다.


모린은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주체적인 존재는 아니다. 영매일 때도 루이스를 쫓았고 자신이 영혼과 교류한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키라가 입을 옷을 나르며 끊임없이 그것들을 욕망하지만 한 번도 가지지는 못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며 파리에서 3개월을 허비하지만 진짜 신호가 올 거라고 확신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잉고의 문자로 자신의 욕망을 직면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떨쳐낸다.


모린은 처음으로 영혼과 소통했다. 어떤 것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모린의 영혼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존재는 본인의 영혼이다. 모린의 인생을 표류하고 대변하던 것들은 모두 죽거나 사라졌다. 잡히지 않는 것들을 쫓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던 모린이 오만에서 돌아온 뒤 어떤 삶을 살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모린이 욕망을 직시하고,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며 무너져있던 모린의 내면을 스스로 쌓아 올릴 힘을 얻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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