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집단 하이카라 / 김혜민 기자 enam.here@gmail.com
문화예술종합가이드,
당신과 나누고 싶은 경험을 담은 글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라고 본다. 나를 살게 하는 모든 게 사랑이지 않겠는가.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로맨스라면 치를 떤다.
왜 로맨스가 싫은지 묻는다면 대중매체의 로맨스는 폭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주인공은 반드시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고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급격히 빠져든다. 그러나 버려지는 이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억지로 키스를 하거나 밤새 집 앞에서 기다리는 일을 낭만이라고 주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겪어봤다면 알 것이다. 원치 않는 사람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힘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덮쳐오는 감정은 설렘이 아니라 공포심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운수 좋은 날’을 재해석한 연극 <로테/운수>의 연출가이자 '창작집단 하이카라' 대표 서승연 씨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항상, 모두에게 공평했는지 묻는다.
나는 서승연 씨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어떤 점에 주목했는지 궁금했다. 작품 내에서 베르테르와 르테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기 때문이다.
“‘젊음 베르테르의 슬픔’은 한창 '안전이별'이 화두가 됐을 때 썼어요. 베르테르가 마지막에 유서에 르테 이름을 쓰고 죽잖아요. 르테는 자신의 상황 때문에 베르테르를 만날 수 없다고 했는데도요. 정말 그게 사랑일까요?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항상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폭력은 가장 파괴적인 행동이죠.”
<로테/운수>의 로테는 30대에 낙성대학교 미술사학과 부교수 자리를 꿰찼고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친구가 있다. 탄탄대로일 것 같던 인생을 뒤흔든 건 사흘 연속 문 앞에 놓여있던 장미꽃이다.
네 면으로 구성된 무대에 등장하는 건 로테 뿐이다. 다른 인물은 대사가 벽에 나타날 뿐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극은 정신과 상담실에 들어선 로테가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며 시작한다.
남자친구, 스토킹 신고를 접수받는 경찰, 로테의 엄마, 베르테르와 그 엄마 등 로테가 타인과 대화하다가 숨이 탁 막히는 순간 흰 바닥은 조금씩 검정 페인트로 덮인다.
“오빠가 마음 놓고 출장 다니겠어?” “집 앞에 장미꽃이 놓여있다고요? 인기 좋으시네.” “잘 생각해 봐. 뭐 여지 준 사람 없어?” “남자친구 별로 사랑하지 않잖아요. 교수님은 더 좋은 남자 만날 자격 있어요.” “한 번만 선처해 주세요. 앞길이 창창한 나이입니다.”
대사는 너무나 익숙했고 그래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집 앞에 장미꽃을 가져다 두는 게 정말 인기를 증명하는 일일까? 스토커 대학생이 대기업에 다니는 애인보다 좋은 남자일까? 21살 대학생과 30대 낙성대 부교수 중 ‘앞길이 창창한’ 게 누구일까.
서승연 씨는 “모두 자기 나름대로는 소중한 존재를 위해 행동해요. 하지만 로테에 대한 배려심은 없죠.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전부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에요”라고 설명했다.
로테는 스토킹을 겪은 뒤 교내에서 가십거리로 소비되지만 일을 쉬진 않는다. 수업자료를 찍는 카메라 소리에 과호흡이 온 적도 있다. 하지만 로테는 상담의에게 ‘괜찮았다’고 말한다.
“진짜 괜찮았어요. 정말 상관없었어요.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저 자신을 놓을 생각은 없었어요. 휴양지에 놀러 가고 일도 열심히 하면서 잊으려고 정말 애썼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독한 년이라고.”
가해자에게 왜 친절하게 굴었는지, 그런 일을 겪고 왜 멀쩡하게 돌아다녔는지. 사회는 지독하게 피학대 여성에게만 ‘피해자다울 것’을 요구한다.
로테 역을 맡은 배우 이혜 씨는 실제로 비슷한 일을 겪었다.
“제가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 30분 안에 근처에 오거나 제가 자주 가는 곳에 매일 가서 저와 마주치길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는 ‘그래, 내가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절 위한 행동이 아니더라고요. <로테/운수>를 하면서 제 가치관에도 큰 변화가 있었어요.”
이혜 씨는 로테의 히스테릭한 면모를 최대한 지웠다고 설명했다.
“정신과 상담실이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얘기해도 받아들여질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성적이어야 관객의 공감을 살 수 있겠더라고요. 스토킹을 인기라고 생각하는 근본적 인식이 바뀌길 바랐어요. 가능한 로테가 중립적인 캐릭터로 보이길 원했습니다.”
기자는 스토킹에 시달려 예민해지는 걸 병증이라고 할 수 있는지보다 로테의 마지막 대사가 뇌리에 남았다. 상담 초반에 말했듯 로테는 자신의 커리어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다. 30대, 회식 2차에는 낄 수 없는 여성, 낙성대학교 부교수.
로테가 정말 ‘평범한’ 사람일까? 아니다. 극 중 로테는 스스로가 잘난 인물인 걸 알고 있다. 로테가 말하는 평범함은 누가 지켜주지 않아도 안전할 수 있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