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켄 로치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켄 로치의 영화는 본 적이 없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내가 처음으로 본 그의 영화였다. 은근 다르덴 형제 느낌 나던데.. 칸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블레이크 아저씨가 고약한 성질머리를 가진 진상손님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만을 법의 예외로 해달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잔디밭에 개똥을 치우지 않고 가는 사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쓰레기를 집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해놓은 이웃에게 욕지거리를 한다. 하지만 카메라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상대적으로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을 '불쌍하게만', '약하게만' 그려내지 않는 방식이 맘에 들었다. 블레이크라는 캐릭터가 가진 입체성이 현실감을 더욱 높여줬다.
영화에서 블레이크의 요구가 얼토당토 않은 것 또한 아니다. 의사는 그에게 심장에 무리가 가므로 (목수) 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질병수당을 신청했다. 국가는 당연히 수당을 줘야한다. 단지 국가가 정한 항목에 따라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질병수당을 받을 자격도 안 되면서 수당을 요구하는 '게으름뱅이'로 취급하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블레이크는 질병 수당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졌다. 국가가 정한 그 항목이라는 것은 얼마나 객관적인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든다. 사람의 상황은 저마다 다른 것인데, 어떻게 질병수당수급자격을 일원화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의사의 의견에 따라 질병수당 자격을 주는 것은? - 그렇게 하자니 부정수급이 우려된다. 의사와 짜고쳐서 멀쩡한 몸으로 질병수당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혈세가 그렇게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보편적 복지는? 사람들이 수당을 신청할 필요도 없게 기본 소득을 뿌린다면.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일하려 하는 사람이 있을까? 세금은 얼마를 부과해야 맞는 걸까?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국가는 나름대로 방안을 세운 건데, 아무리 많은 수를 고려해서 정책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사각지대는 어딘가에 생긴다. 그렇게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위기에 내몰린다.
또한 수당은 직접 찾아서 신청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온갖 정보력을 동원해서 수당의 존재를 알아내고, 수급 자격을 따져보고, 복잡한 서류들을 여럿 발급받은 후, 여러가지 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엔 이 과정이 인터넷으로 이뤄질 때도 많다. 수당을 받는 경우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 일부는 노인이다. 노인에게 이 과정은 번거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행정에선 노인의 사정따위는 고려 대상 밖이다. 소수니까. 고려하기 귀찮으니까.
블레이크는 결정적인 순간에 죽는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죽을 것이라 예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다. 영화에 나오는 케이트 만큼 울었다. 그가 이 사각지대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영화 앞부분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무력해지며 슬퍼졌다. 영화에서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 마저도 대부분은 사회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감독이 그들의 노력으로 블레이크가 질병수당을 성공적으로 받아냈다는 서사보다는, 그의 죽음이라는 서사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문제는 개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으며, 정부가 해결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제2초점인물인 케이트의 이야기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두 번의 이혼 후 아이 둘을 모두 떠맡게 된 여성. 생리대 살 돈도 없어서 슈퍼마켓에서 생리대를 훔칠 수 밖에 없었던 그녀. 공부를 통한 재기를 꿈꿨으나, 당장 아이 운동화 사줄 돈이 필요해서 성매매까지 하고 마는 그녀. 그녀가 수당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단지 버스를 반대로 타서 10분 지각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 약속은 소중하지만, 그게 그토록 중요한가? 이 여성을 이렇게 궁지로 내몰 만큼?
케이트는 식료품 지원 센터에서 식료품을 수급하던 중에 몰래 구석에서 캔을 따서 베이크드 빈을 먹다가 걸려, 수치스러워하면서 오열한다. 이 장면은 식료품 지원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수급자들만 오가는 배급코너를 따로 만드는 것은, 효율성을 위해서 인간성을 타협한 결과가 아닐까? 그들이 '수급자'라는 수치심을 받지 않도록 배려해서 배급하는 방식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