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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May 31. 2023

꼭 영어가 아니더라도 많이 들어요

0~4세: 시각보다는 청각 중심으로 생활 

저는 “아이가 그저 행복하게만 자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엄마는 아닙니다. 솔직히 아이가 똑똑하기도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맘카페에서 어떤 교구가 사고력 향상에 좋다더라, 무슨 수업이 논리력을 키워준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탐나던 유대인 영재교육을 기반으로 했다는 000 교구를 좀 저렴하게 구입했다는 게시글을 봤을 땐 구입처를 알려달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고요.     


하지만 늘 통장에 찍히는 돈은 뻔했고, 아이를 먼저 키워본 선배 교사들은 “아이가 어릴 때 괜한 돈 쓰지 말고, 중고등학교 때를 위해 저축해둬라.”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저는 결국 어떠한 교구와 교재도 구매하지 않았어요. 순간 욕심은 났지만 경제적 무리를 하면서까지 해주고 싶진 않았습니다. 창의, 논리, 사고 등의 문구가 붙은 교구를 사고 수업을 들어야만 그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평소 누군가와 좋은 관계로 지내려면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싫어하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데요. 육아도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에게 새로운 뭔가를 이것저것 해주려 하기보다 좋지 않다고 검증된 것을 차단하는 육아가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저는 4세까지는 TV, 컴퓨터, 핸드폰 등의 영상물을 최대한 보여주지 않겠다는 육아 원칙을 세웠습니다. 제가 이런 가이드 라인을 정하게 된 건 임신 시기에 밑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여가며 열심히 읽었던 <뇌가 좋은 아이>라는 책 때문입니다. 이 책은 KBS 읽기혁명 제작팀이 영·유아 교육, 소아 정신과, 뇌 과학, 독서학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책인데요.     


책에서는 ‘2세 미만의 아기에게는 절대 TV를 보여주지 말라’는 미국 소아과학회의 경고를 언급하며 영유아 시기 영상물에 노출이 되면 뇌 발달 과정에 꼭 필요한 다양하고 긍정적인 자극을 제대로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영상 노출의 적정 시기는 3세 이후이며, 그것도 유아용 영상을 아주 짧게 보는 것만 권합니다. 언어교재 등의 본격적인 영상물 시청은 5세 이후가 바람직하다고 하죠.      


학교 현장에서 많은 아이들을 만나본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그렇습니다. 산만하거나 폭력성이 높은 아이 또는 무기력하거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상담해보면 어김없이 어릴 때부터 영상물에 무방비로 노출된 경우가 많았어요. 반대로 차분하면서 생각이 깊고 창의적인 아이는 학습 목적 외에 영상 시청을 단호히 제한하는 가정에서 자란 사례가 많았고요.      


육아에서 영상을 배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교육적 효과를 얻을 거라 믿었습니다. 특히 그 어떤 비싼 교육기관에서도 쉽게 발달시켜 줄 수 없는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고 봤어요. 우리 아이가 가졌으면 하는 창의력, 문해력, 독서력, 학습능력은 바로 그 힘에서 나오거든요. 그래서 저는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 방향으로 가려고 애썼습니다.     


사실 TV, 컴퓨터, 핸드폰을 가까이하면 교육상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죠. 저 또한 그랬습니다. 부모인 제가 TV를 참지 못해 힘들었어요. TV를 못 보게 하면 아이가 무척 힘들어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처음부터 TV를 멀리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크게 불편함 없이 적응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시절 첫 습관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저는 차마 TV를 없애진 못하고, 나중에 아이 영어학습용으로 사용할 것을 대비해 그냥 놔두었는데요. 거실에 앉으면 TV가 정면에 턱 하니 보이니 하루에도 몇 번씩 저도 모르게 리모콘을 집게 되더라고요. TV가 시야에 들어오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방법을 찾던 중 TV 가리개(패브릭 커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바로 구입하여 TV를 덮어놓았습니다. 확실히 보고 싶은 마음이 덜 들더라고요. TV를 볼 땐 가리개를 벗겨야 하는데 그 단계를 거치는 게 꽤 귀찮아 잘 안 보게 됐어요. 티셔츠 한 장 값도 안 되는 아이템 하나가 TV 안 보기 습관을 굳히게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TV가 없으면 지루하고 무료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켰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라디오 전원 버튼부터 눌렀어요. 그때는 '굿모닝 FM 전현무입니다', '장일범의 가정음악',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 등 즐겨 듣는 저만의 편성표가 있었어요. 저는 아이를 위한 교육용 CD만 틀지 않았어요. 고단한 육아를 버틸 수 있도록 제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들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아이는 ‘정오의 희망곡’ 오프닝 시그널을 콧노래로 흥얼거리곤 해요.       


아이에게 영어동요 위씽 시리즈(WeeSing for Baby, WeeSing in the car 등), 노부영 베이비 베스트 등을 들려주긴 했지만 그것만 들려주었던 건 아닙니다. 태교 때부터 시작해 출산 당시 분만실에서도 틀어놓았던 <백창우의 음악태담>을 정말 매일 같이 들었고요. <최승호, 방시혁의 말놀이 동요집>, <놀이동요 : 인기 동요>, <전래동요 : 우리 겨레 우리 동요>, 벼룩시장에서 싸게 구입했던 <국악창작동요전집 : 재미모리동동> 등도 참 많이 들었어요.      


아이와 함께 클래식도 자주 들었습니다. 순전히 제가 좋아서 틀어놓았던 건데요. 평소 클래식 FM, Radio Swiss Classic(24시간 클래식 음악만 나오는 앱)을 고정 채널로 놓고 늘 거실에 음악이 흐르게 했어요. 제가 베토벤을 좋아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아이는 시각이 아닌 청각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이런 생활 습관이 5세 이후 아이에게 영어 노출을 할 때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꼭 영어가 아니어도 지속적으로 다양한 소리와 음악에 노출되었던 경험은 아이로 하여금 청각적 주의력과 청각적 학습 능력을 발달시켜준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아이와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아이는 길거리 소음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의 선율을 듣고, ‘전원교향곡’이라면서 알아차리더라고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상담을 갔을 때도 항상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선생님이 설명할 때 집중해서 잘 듣는다며 아이의 듣는 태도를 칭찬하셨어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익힐 때처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양의 듣기부터 시작해야 하는데요. 아이는 보지 않고 오직 듣기만 한 경험이 많았기에 소리에 대한 감각과 민감성을 키울 수 있었고, 듣는 것에 대한 집중력과 주의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어요. 듣기에 익숙하고, 비교적 듣기를 잘 하는 아이가 된 거죠.      


그래서 영어 노출을 했을 때도 들리는 것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려는 능동적인 듣기를 할 수 있었고요. 이는 저만의 생각만이 아닙니다. <엄마표 영어 17년 보고서>의 저자도 아이에게 클래식, 영어 동요를 많이 들려준 것이 영어 귀를 뚫게 하는데 큰 일조를 한 것 같다고 말하며 파닉스, 영어동요, 클래식의 높은 연관성을 짚어주고 있어요.     


<초등 듣기 능력이 평생 성적을 좌우한다>라는 책에서는 ‘듣기능력’과 ‘학습능력’의 높은 상관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듣기’를 저절로 길러지는 능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듣기는 들리기(hearing)이며 내용을 이해, 분석, 종합하는 듣기(listening)와 다름을 지적합니다. 학습을 위한 ‘듣기’는 노력과 교육이 동반되어야 향상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저는 청각 중심의 생활, 다양한 소리의 노출 경험이 듣기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아이에게 보여주지 말고, 많이 들려주세요. 그렇다고 훈련을 받는 것처럼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듣기를 하라는 게 아니라 함께 듣고 서로의 느낌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듣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어릴 때 무엇이든 많이 들어야 듣기에 익숙해지고, 듣기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어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이미 영상에 노출된 아이는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까요?  지금부터 조금씩 고쳐나가면 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까지는 충분히 습관을 개선할 수 있다고 봐요. 영상물을 점차 줄이고, 즐거운 듣기 경험을 많이 만들어주세요. 아이가 시각적인 자극이 없으면 집중을 하지 못하고 지루해할 것이라는 건 편견이에요. 저는 학교에서 반 아이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주고 있는데요. 아이들이 책을 보지 않고 듣기만 하는데도 얼마나 이야기에 빠져드는지 몰라요. 부모님이나 아이 본인이 책을 낭독한 것을 녹음하여 아이에게 들려줘 보세요. 듣기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영상 콘텐츠를 틀어주되 화면을 가리고 듣게만 해보세요. 듣기만 하면 이해가 잘 될까, 재미가 없지 않을까 의심이 들 수도 있는데요. 날마다 선생님이 읽어주는 책을 듣는 저희반 아이들이 말하더라고요. 들으면 자기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어 더 재밌다고요. 아이가 원하는 컨텐츠를 제공하되 화면은 보지 않고 듣기만 하도록 해줘 보세요. 그것만 해도 생각하고, 상상하고, 집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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