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4시, 라임색 시집 한 권을 들고 동백의 동네서점 반달서림에 갔다. 고명재 시인의 낭독회가 있었다. 서점에 조금 일찍 도착해 반달과 5펜스 리워드 시집으로 황인찬의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와 라이너 쿤체의 <은엉겅퀴>를 골랐다. 랩핑이 되어 여러 권 쌓여있던 고명재 시인의 에세이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도 한 권 집어 들었다.
서점 전면에는 ‘페이스트리’와 ‘미더덕은 아름다움을 더 달라는 것처럼’ 시 전문이 프린트된 패브릭이 걸려있었다. 종이가 아닌 커다란 사이즈의 천에 적힌 시를 읽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고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낭독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점지기는 반달과 5펜스 회원들이 시인에게 갖는 남다른 애정을 전하며 한 회원의 ‘고노랑 적금’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고노랑 적금이란 고명재 시인에 관한 여러 가지 항목을 만들어 그에 해당될 때마다 일정 금액을 저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인이 인스타 피드를 올리면 이천원, 낭독회를 하면 천원, 시인 신문기사가 나오면 천원 이런 식이다. 그중 시인의 시와 산문과 관련된 이런 항목도 있었다. 무지개가 떠오를 때,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빵을 구울 때.. 한 시인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만든 일상의 명랑한 장면. 이는 또 얼마나 소중한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본 시인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시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순수하고 선한 청년의 목소리로 시를 낭독해주셨는데 마치 영화 속 인물의 나레이션을 듣는 것처럼 빠져 들었다. 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 시에 어떤 마음을 담고 싶었는지,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등 시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듣게 되니 이제야 시가 내 마음에 자리를 잡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항상 작가들은 무슨 책을 읽을지가 가장 궁금하다. 시인은 어떻게 알았을까.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추려 자료집을 만들어 나누어주셨다.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너무 기뻤다. 독자와 이 시간을 귀히 여기는 시인의 정성과 진심이 느껴졌다.
토니모리슨의 <빌리버드> 일부분을 읽어주시며 이 책에서 받은 감동을 시인의 언어로 전해주셨다. 시인이 전해주는 책 이야기는 또한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금도 꽃나무를 따라가라는 인디언의 말을 듣고 달려가는 노예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 존재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방향이 꽃이 피는 방향과 같다니. 책을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에세이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도 낭독해주셨는데 ‘뼈’라는 글을 읽어주실 땐 눈물이 차올랐다. 시집도 좋지만 이 에세이는 정말 침대맡에 두고 매일밤 읽고 싶은 책이다. 내 말과 눈빛이 전보다 조금은 더 따뜻해지고 다정해진다면 이 책 덕분인 것 같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
낭독회에서 한 독자가 시인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아름다운 건 눈물이 날까요?”
“유한성 때문이 아닐까요.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사라질 걸 예감해서 그런 것 같아요.”
내 곁에 있는 사람과 내 하루, 그 안에 있는 시. 이 모두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마음을 담아 말하고 바라보고 사랑하는 일뿐이겠지. "햇빛이 들어오니 커텐을 칠까요?"라는 서점원의 조심스럽고 다정한 말에 우리는 괜찮다고 답했다. 낭독회가 끝나고 싸인을 요청드리자 시인은 시집에 잉크가 묻어날까봐 호호 불어가며 '눈 감으면 보이는 빛과 사랑 속에서'라는 글귀를 적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