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엄마가 짜증 내는 최악의 날이었다.’
방학 첫날 아이와 서울 나들이를 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을 본 후 이태원에 들러 요즘 핫하다는 스페인 츄러스도 사먹고, 수요미식회에 나왔던 짬뽕도 먹었다. 날은 더운데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기운이 없었다. 곧장 집으로 가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한숨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독서 4시간’이란 글자가 굵은 글씨로 떠다녔다. 오늘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하루에 4시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 ‘다음 정류장은 △△도서관’이라는 버스 안내 멘트를 듣고 벨을 눌렀다. 입을 벌린 채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워 버스에서 서둘러 내렸다.
“지금 4시니까 6시까지 읽고 가자. 아까 아침에 2시간 읽었으니 지금 2시간 읽으면 돼.”
아이의 이번 여름방학 목표는 ‘몰입독서’다. 매일 4시간 책을 읽는 것. 되도록 도서관에서 읽도록 하고, 주말에는 2시간을 읽는다. 2학년 때부터 아이는 방학이 되면 학원에 다니는 것처럼 도서관에 다녔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도서관에 가서 1시간 동안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읽게 했다. 아이 혼자 스스로 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기에 나 또한 아이 옆에 앉아 함께 책을 읽었다. 비싼 학원비는 못 대줘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거였다.
아이는 평생성적이 결정된다고도 말하는 4학년이다. 학습의 밑바탕인 문해력을 확실히 단단하게 다져놓아야 할 시기다. 이제껏 아이는 교과(영, 수, 국 등) 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고, 지금 다니는 학원도 피아노와 수영이 전부다. 학기 중보다 더 빡빡한 스케쥴로 학원에 다니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봤을 때 오직 ‘독서 4시간’은 그렇게 과중한 양은 아니라고 봤다.
방학을 해서 그런지 도서관은 평소보다 북적북적했다. 아이는 서가로 가서 책을 골랐고 나는 테이블 빈자리를 찾아 미리 챙겨간 소설책 <취미는 사생활>을 꺼내 읽었다.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냅다 엎드려 자고 싶었지만 그러면 아이 의지도 약하게 만들 것 같아 화장실에 가서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왔다. 어느 틈엔가 아이는 내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인가 봤더니 <The mystery in Venice> 제로니모 책이었다. 나는 ‘또 제로니모야?’라는 말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아이가 영어책을 보면 지금은 한글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 탐탁지 않았다. ‘고지식하다’를 지식이 많다는 뜻으로 알고 있어 나를 놀라게 한 아이 모습이 떠올랐다. 또 아이가 좋아하는 시리즈의 책만 주구장창 읽으면 책을 좀 다양하고 폭넓게 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래저래 걱정이 많은 내 모습을 자각하고 아이가 뭘 보든 잔소리 말고 그냥 놔둬야겠다는 다짐을 하던 참이었다. 아이는 제로니모 책을 두어 권 읽더니 이번에는 두툼한 <Garfield> 만화책을 가져왔다.
몰입독서 첫날이다. 어떻게든 책을 잘 보게 하려고 힘든 몸을 이끌고 도서관까지 왔는데 아이는 만화책을 펼쳤다. 나는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네가 지금 여기서 만화책 볼 때냐고 소리치며 책을 낚아채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아이 귀에 대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오늘 전시회 다녀왔잖아. 그걸 글로 써 보는 거 어때?”
마땅한 종이가 없어 손바닥만 한 내 수첩을 주었다. 아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연필을 잡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이를 보니 그새 가필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글쓰기 하라니까!”
그러자 아이는 “했어요!”라며 인상을 팍 쓰고 수첩을 내밀었다. 아이의 글은 큼직한 글씨로 작은 수첩의 한쪽만 채웠을 뿐이었다. 글에는 오늘 본 전시회의 제목조차도 없었고, 기억에 남는 작품에 대한 묘사와 감상도 매우 짧았다.
“야. 2학년인 우리반 애들도 이것보다는 잘 쓴다. 다시 자세히 써.”
“다 쓴 거예요. 쓸 게 없어요!”
아이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전시 제목, 작품명, 그리고 그게 왜 마음에 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써봐. 그리고 우리 이태원 가서 맛있는 것도 먹었잖아. 그 얘기도 쓰면 되겠네.”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말했다.
“난 그 츄러스 별로였다고요! 엄마가 가자고 해서 간 거라고요!”
그러면서 아이는 수첩 빈 페이지에 글씨를 빠르게 채워나갔다. 다 쓰고 나서는 수첩을 내게 밀었다. 아이가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오늘은 엄마가 짜증 내는 최악의 날이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교직 경력 중 가장 힘들었던 학기를 보내고 맞는 방학 첫날이었다. 나도 많이 지치고 피곤했다. 그래도 내 딴에는 이번 방학을 의미 있게 시작하고 싶어 푯값이 비싸고 예매하기 어려운 전시를 힘들게 예약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핫플이라고 하는 가게를 찾아 돈도 많이 썼다.
방학이라고 종일 학원에 보내는 대신 아이와 도서관을 찾았다. 아이가 혼자 책을 읽으면 힘들고 지루한 일이 될 것 같아 옆에 앉아 나도 같이 책을 읽었다. 나는 왠지 모를 억울함과 배신감이 들었다. 책과 필통을 거칠게 가방에 쑤셔 넣으며 아이에게 매몰차게 말했다.
“야. 다 그만둬.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살아.”
그러자 아이는 자기 음료수병을 챙겨 혼자 도서관 밖으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