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 감상
(1) 자신의 선택이 된 떠도는 삶
떠돌이의 삶은 고단하기에, 처음엔 선택이 아니라 내몰렸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영화의 주인공인 펀은 커다란 상실과 함께 길을 떠난다. 엠파이어 지역의 석고 보드 광산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펀은 병으로 남편을 잃는다. 그들이 일하던 광산도 문을 닫아 집과 일자리도 잃는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의 우편번호가 사라졌다는 설명은 자못 상징적이다. 근대인은 공식적인 기록에 속하여 살아가는 존재인데, 우편번호와 함께 그녀가 속해있던 공동체, 가족 그리고 집이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대변되는 시대의 흐름은 늘 그 뒤에 소외된 이들을 남겨놓는다. 단, 서 있을 한 켠의 자리도 남겨놓지 않고 사람만을 덩그러니 남겨놓는다. 따라서 떠돌이 생활은 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마치 던져진 것처럼 시작된다.
이렇게 별 목적이나 의지 없이 시작한 노매드 생활은 고달프다. 펀은 밴을 타고 떠도는 노마드들의 모임인 RTR 커뮤니티에 참여한 후에도, 모두가 밴을 끌고 다음 여정지로 떠나갈 때 홀로 캠핑장에 남아 덩그러니 앞을 바라본다. 그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듯 보인다. 서로에게 친절하지만 서로를 책임지지 않는 무심하고 느슨한 관계 속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별과 만남이 반복되는 노마드 생활은 그녀가 겪은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가르침을 준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안식처가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수없이 자신을 스쳐가는 풍경과, 물건과, 사람들 속에서 펀은 점점 자발적인 노마드가 되어간다.
그래서 언니 집에 갔을 때, 데이브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펀은 그들에게 정착을 권유받지만 모두 거절한다.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이용해 돈을 버는 언니의 가족과 바로 그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상실을 경험한 펀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 아들의 잃어버린 유년기와 화해하고 가족의 가치 속에서 안정을 맞이한 데이브와 하나뿐인 가족인 남편을 잃은 펀은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펀은 데이브가 제공한 안락한 침대를 두고도 자신의 밴에 들어가 그제야 잠이 든다.
영화의 시작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수미상관으로 겹친다. 창고에 자신의 짐을 다 놓고 갔던 펀은 그 짐을 처분하러 엠파이어에 돌아온다. 한때 남편과 사용했던 물건들을 보며 "이제 어떤 것도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노마드 생활에 대한 그녀의 확신을 보여준다. 자발적이지 않았던 떠돌이 생활이 이제 그녀 자신의 선택이 된 것이다.
(2) 만남과 헤어짐의 순리
그렇다면 펀이 상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한 노마드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만남과 헤어짐의 순리이다. 노마드 생활은 펀에게 내 옆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돌고 돌게 마련이라는 자연스러운 순리를 알려준다.
노마드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 펀은 남편과의 이별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미련은 그녀가 오랫동안 떠나지 못한 엠파이어 지역의 창고에서 보인다. 작은 밴 하나에 타고 생활할 그녀가, 남편의 옷과 머그컵 등 남편과 함께 쓰던 물건들을 창고에 보관해놓고 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영화는 크고 작은 장면들을 통해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펀은 처음 RTR 커뮤니티에 갔을 때 데이브에게 캔 오프너를 받고 또한 그녀의 물품을 나눠준다. 스웽키는 할머니가 스웽키에게 직접 만들어준 인형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준다. 펀이 방랑자 소년에게 준 라이터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을 겪은 공룡 뼈로 만들어진 라이터가 펀에게 돌아온다.
물건과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내 옆에서 사라지지만 그들의 기억은 영원하다. 마치 펀이 보고 있는 별이 1987년이라는 먼 과거의 빛을 우리에게 보내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펀이 끼고 있는 결혼반지는 이러한 순환의 논리를 상징하는 물건과도 같다. 동그랗기 때문에 끝이 없는 원형의 반지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펀의 여정도 하나의 원을 그린다. 남편을 잃은 엠파이어에서 출발하여 다시 엠파이어로 돌아온 펀은 또다시 길을 떠나며 커다란 원의 궤적을 남긴다.
이 영화가 순환의 논리를 말하고 있다고 결정적으로 느낀 장면은 펀이 아들을 잃은 RTR 커뮤니티의 리더 밥 웰스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밥은 아들의 자살이라는 상실을 겪는데, 수많은 타인들을 도와주는 것이 그를 기리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노마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노마드 생활에서 만난 또 다른 노마드들에게 영원한 이별의 말을 하지 않는데, 길 위에 있으면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펀은 이 대화에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고 이별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 이별이 있으면 재회가 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다시 만남을 기도하니 한편으로는 모순적이지만, 모두가 길 위에 있는 한 언젠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한용운의 이 시구처럼 말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기실 우리는 모두 고정된 존재가 아니고 영원히 순환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낭만적인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우리는 우주 속에서 돌고 돌며 영원한 시간을 살아간다. “별이 폭발하면서 뿜어낸 플라스마와 원자가 가끔 지구에 떨어져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우리의 일부가 된다.” 영화 속 이 대사에서 보여지듯 우리를 구성하는 성분 중 일부는 언젠가 저 멀리 우주에서 빛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죽은 후에 다시 우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듯 생명도 무수히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펀은 밥 웰스가 그랬듯 “언젠가 길에서 만나자(I’ll see you down the road)”라고 말하며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또다시 길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