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어떤 기억은 일어났던 일 그 자체보다 냄새와 같은 감각으로 기억된다. 소설이 시작함과 동시에 화자의 삶은 해인초 냄새가 가득한 중국인 거리로 옮겨온다. 화자에게 중국인 거리는 해인초 끓이는 냄새, 햇빛, 공복감 등 노란색이라는 색채 감각으로 기억된다.
그 낯선 거리에서 ‘나’는 할머니, 어머니, 메기 언니와 같은 어른 여성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해 그 아픔으로 냉정하고 잔인한 성정을 가지게 된 상처받은 여성상이며, 어머니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동물적인 여성성을 ‘나’에게 보여준다. 메기 언니는 갖가지 화장품과 향수병, 귀걸이, 페티코트, 속눈썹 같은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나’와 치옥을 혹하게 하지만 결국 미군들의 칼에 맞아 죽은 고양이처럼 허망하게 죽는다.
폭력적인 남성성에 의해 휘둘리고 상처받는 여성성을 목도하며 ‘나’는 그녀들과 ‘나’가 공유하는 여성성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여성성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할머니가 평생 지녔던 조각난 비취 반지 등의 유품을 묻어두고 다시 찾는 등 할머니 개인의 삶에 대해 애도한다. 성인 여성에 대해 느끼는 매혹, 혐오, 연민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화자는 그 거리에서 자기 자신이 가지는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맞이하게 된다. 언덕 위 이층집에서 나를 바라보는 창백한 얼굴의 남성을 보며 ‘나’는 “알지 못할 슬픔이, 비애라고나 말해야 할 아픔이 가슴에서부터 파상을 이루며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낀다. 처음으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신경쓰게 된 것이다.
유년기와 영영 멀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 슬픔을 느낀 것일까? 그 비애의 감정은 ‘따스한 핏속에서 돋아오르는 순(筍)’, ‘참을 수 없는 근지러움’ 같은 역동적인 욕망으로 자리잡는다. 그에게 선물을 받아 돌아온 날, ‘나’는 첫 초조(初潮)를 맞이한다. 어머니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고 성당의 종소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유년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의 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소설 속 한 장면
나는 깜깜하게 엎드린 바다를 보았다. 동지나 해로부터 밤새워 불어 오는 바람, 바람에 실린 해조류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중국인 거리, 언덕 위 이층집의 덧문이 열리며 쏟 아져 나와 장방형으로 내려앉는 불빛과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연 한 봄의 숨결이 숨어 있었다. 나는 따스한 핏속에서 돋아오르는 순(筍)을, 참을 수 없는 근지러움으로 감지했다.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다만 복 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거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