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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Feb 25. 2022

심재헌 좌망대

心齋軒 坐忘臺

1. 풍연심풍연 그리고 누렁이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때입니다. 주변 분들과 식사를 하던 중 한 선배가 <장자(莊子)>에 있는 ‘풍연심(風憐心)’이라는 말을 들려줬습니다. ‘바람은 마음을 그리워한다 혹은 부러워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해 보여 기억에 심어 뒀습니다.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겠지 하는 얄팍한 마음이었습니다. 순전히 멋 부림으로 고전 <장자>를 처음 만났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척하다 들통나면 낭패입니다. 망신당하기 전에 제대로 알아두려고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서가에는 많은 장자 해설서가 꽂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풍연심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외편> <추수편(秋水編)>에 실려 있는 이 말은 일종의 사이드 메뉴입니다. 


장자의 메인은 7편으로 구성된 <내편>입니다. 내편을 제외한 <외편>과 <잡편>은 내용의 일관성과 사상의 깊이, 문장의 격이 내편과는 사뭇 다르다고 합니다. 장자 본인의 글이 아니라는 게 정설입니다. 풍연심을 소개하는 인터넷 블로그는 넘쳐나도 정식으로 출판된 해설서에서는 정작 다루지 않는 이유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의 장자식 버전입니다. A는 B를 부러워하고, B는 C를, C는 D를,,,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F는 다시 A를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순환고리 중에 ‘바람은 눈(目))을, 눈은 마음을’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눈’을 건너뛰고 바람을 마음에 곧장 연결한 게 ‘풍연심’입니다.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인다고 그것만 쳐다볼 게 아니라, 지금 내 손에 쥔 떡, 내가 깔고 앉은 자리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별 차이 없으니까 이것저것 가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래도 ‘풍연심’ 자체는 여전히 느낌이 좋아 그대로 잊어버리기에는 아쉬웠습니다. 한동안 궁리하다 마지막 ‘심’을 떼어내고 별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풍연(風憐)’입니다. 굳이 풀어보자면 ‘바람을 그리워하다, 바람이 그리워하다’입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닉네임으로 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누렁이’를 별명으로 썼는데, 불쌍한 누렁이는 끽소리 한번 못 내고 바람에 날라가 버렸습니다.     


2. 내가 읽은 장자     


‘풍연심’이 별명만 남긴 건 아닙니다. 처음 도서관에서 접한 뒤로 몇 차례 읽어본 장자는 재미있었습니다. 원숭이와 수 싸움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헷갈린다는 비몽사몽 ‘나비의 꿈’ 이야기, 귀신같은 솜씨가 뭔지 보여주는 ‘포정’의 소 해체 쇼(庖丁解牛) 이야기는 하나같이 흥미진진합니다.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고전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이야기 할머니가 풀어내는 옛날얘기로 가득합니다. 절묘한 비유(metaphor)를 넋 놓고 따라가다 보면 기막힌 풍자의 숲에 다다르고, 어느새 뒤통수를 갈기는 위트와 해학의 바다에 닿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서서히 진짜 장자에 빠져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몸속 세포 하나하나가 저 멀고 거대한 안드로메다은하만큼 부풀어 오르고, 내 몸뚱이가 노린재와 다르지 않은 세상이 열립니다. 가슴은 때로 쿵쾅쿵쾅 웅장해지고 이따금 한없이 쪼그라듭니다. 


보통 노자, 장자라 하면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먼저 떠올리고, 산속 깊은 곳에서 풀뿌리 캐 먹고 사는 ‘자연인’을 그립니다. 뭔가 애써 하려 하기보다는 무위(無爲)로써 자연과 하나가 되라는 건 맞지만, 문명과 동떨어진 채 거지꼴로 사는 무지렁이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강남 선생님은 <장자(현암사)>에서 좌망(坐忘), 심재(心齋), 상아(喪我)를 장자의 핵심으로 꼽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나를 잊으라’는 말입니다. ‘자기 버리기’는 장자뿐 아니라 모든 종교 전통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나를 가운데 두고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으로 삶을 설계합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면 불가피하게 옳고 그름(是非), 좋고 싫음(好惡), 아름답고 추함(美醜), 착하고 악함(善惡). 길고 짧음(長短) 같은 분별이 생겨납니다. 분별은 스스로에게는 괴로움을 낳고 서로 간에는 갈등을 낳습니다. 그렇게 굳어진 마음, 선입견이나 편견을 <장자> 본문에서는 성심(成心)이라고 하고, 오강남은 ‘이분법적 의식 세계’라고 풀어냅니다. 


성심을 깨트리라는 게 <장자>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갈등과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일상적 이분법의 세계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자의식과 편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쫄쫄 굶기라고 합니다(心齋). 이런 과정을 거쳐 나무토막처럼 몸뚱이가 바짝 마르고, 죽은 재같이 마음속 수분이 모두 날아간 뒤(枯木死灰) 마침내 찾아오는 無我의 상태가 坐忘이고 喪我입니다. 분별지와 분별의 세계를 극복한 초이분(超二分)의 세계입니다. 예전의 작은 ‘나’가 죽고 큰 ‘나’로 다시 태어나서 만나는 세상입니다. 이 과정을 두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고, 자기를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한다’라고 극적으로 표현합니다(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새로 태어난 사람은 어디에도 메이지 않습니다. 얼음이나 눈처럼 맑은 살갗에 이슬을 마시고 삽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구만리 장천을 날아다닙니다. 절대 자유를 누리는 이상적 인간 지인(至人)입니다. 우리에겐 ‘이것이냐 저것이냐’인 세상만사가 그에게는 ‘이것도 저것도’가 됩니다.     


3. 심재헌 좌망대     

친구에게서 오래전에 나무토막 하나를 얻었습니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부터 뭔가를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동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벼르다 드디어 칼을 댔습니다. 이른바 ‘서각’입니다. 어설픈 솜씨로 쓴 글씨를 오려 붙인 다음, 그보다 더 어설픈 솜씨로 각을 뜹니다. 한 번에 한 획씩 띄엄띄엄, 몇 날 며칠에 걸쳐 파냅니다. 한 달여가 지나자 겨우 꼴이 갖춰집니다. 


글씨는 ‘심재헌(心齋軒)’입니다. 각 뜬 면을 사포로 다듬고 조심스럽게 먹물을 입힙니다. 떨리는 손을 달래가며 코팅을 마칩니다. 역시나 어설픈 마무리입니다. 너저분한 게 숨겨진 건 고마운데, 입체감이 사라진 건 아쉽습니다. 문설주 위 통나무에 걸어 두고 사진을 찍습니다. 어리숙하고 맹맹합니다. 이만하면 좋습니다. 


집 옆에 높은 산에서 흘러내린 골짜기가 있습니다. 골짜기에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바위가 엎어져 있고 그 위로 물이 흐릅니다. 바위는 긴 세월 동안 자기 등짝을 긁어내고, 모퉁이를 깨트려 온 물을 넉넉한 품으로 받아 냅니다. 바위를 지나는 물은 더러는 석간수가 되어 급하게 흐르고, 더러는 웅덩이에 머물며 숨을 고르고, 더러는 폭포수가 되어 자유낙하 합니다. 

바위 위 아무 데나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만합니다. 폭포 위에서는 몇 미터 아래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과 요란한 소리에 오감이 정지됩니다. 석간수에 발을 담그면 센 물살이 만들어 낸 부드러운 압박감에 온몸의 긴장이 풀어집니다. 웅덩이 옆 너른 바닥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에는 골짜기를 향해 기울어진 나무들이 만들어낸 작은 하늘 못이 둥둥 떠 있습니다. 누구든 잠시라도 앉아 있으면 자기를 잊게 됩니다. 이왕에 집에 써 붙여놓은 ‘심재헌(心齋軒)’과 맞붙여 ‘좌망대(坐忘臺)’라고 이름 짓습니다.


거친 판때기에 ‘심재’를 새긴다고 마음에 잔뜩 낀 기름때가 빠질 리 만무합니다.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 ‘좌망’이라고 이름 붙여 본들 층층이 쌓인 자의식이 사라질 리 없습니다. 그저 오며 가며 한 번씩 눈에 들어온다면, 그래서 잠시나마 마음 다이어트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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