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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Mar 05. 2022

스마트폰과 빈 배

1. 강남역 그 사람


매일 강남역에서 전철을 갈아탑니다. 긴 환승구간은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북적댑니다. 게다가 원하는 승강장에 도착하려면 밀려오는 사람의 강을 몇 차례나 건너야 합니다. 다들 제 갈 길 가느라 분주한 그곳에 사람이 있습니다. 책상다리 사이로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정물처럼 앉아 있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가 그녀가 뭘 하는지 알려 줍니다.


지난해 가을, 새롭게 전철을 이용해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처음 봤을 때 눈을 의심했습니다. 서울 한복판 가장 부자 동네, 그것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강남역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닙니다. 같은 역 신분당선 승강장에 걸려있는 ‘싸이’의 위풍당당 ‘강남스타일’ 벽화나 어울릴 법한 공간에 생뚱맞은 풍경으로 널려 있습니다.


눈길을 한 번 더 잡아끈 건 특이한 마스크 착용법입니다. 한껏 위로 끌어 올려 얼굴 전체를 감쌌습니다. 코와 입뿐 아니라 눈까지 완전히 가렸습니다. 세상이 나를 보는 게 싫을 수도 있고, 내가 세상을 거부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세상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 놓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쉴 새 없는 사람의 물결 속에 홀로 정지해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소쿠리는 비어 있거나 천 원 지폐 한두 장이 들어있거나 혹은 오백 원짜리 동전이 들어있거나 했습니다. 한동안 그냥 지나치다 몇 번 천 원짜리를 넣었습니다. 일부러 천 원짜리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더러 만원 지폐를 건넬 때는 팔을 쳐 주머니에 넣으라 말하고 잰걸음으로 멀어졌습니다. 소쿠리에 만 원짜리 지폐가 놓여 있는 게 영업(?)에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갸륵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역시 만 원짜리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만지작거리며 환승통로로 접어드는데,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주머니에 돈을 도로 집어넣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속은 것 같았습니다. 누구랑 통화하는 거지? 가족이 있나? 가족이 있는데 왜 이러고 있지? 휴대전화는 무슨 돈으로 샀을까? 요금은 어떻게 내지? 연달아 의문이 생겼습니다.


2. 빈 배


그날 이후 환승구간을 지날 때면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곁눈질로 마스크를 훔쳐보며 시답잖은 질문을 되뇌었습니다. 유쾌하지 못한 질문을 반복하는 스스로가 불쾌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그래서?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로 질문이 바뀌자 찝찝한 게 사라지고 개운해졌습니다. 그 사람의 스마트폰과 내 주머니 속 만 원짜리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질문이 바뀐 건 빈 배 이야기 덕분입니다.


A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넙니다. 이때 다른 배가 떠내려 와 부딪칩니다. 만약 그 배에 아무도 없다면 A는 “에이, 오늘 재수가 없네.”라고 툴툴거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갈 길을 갑니다. 그런데 누군가(B) 타고 있다면 B를 향해 “당장 비키지 못해?” 소리치다가 종내는 욕을 하고 화를 냅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B의 입장에서 빈 배처럼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면 해롭지 않을 거라고 조언합니다.


관심을 끈 건 A입니다. A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에게 떠내려 와 부딪힌 배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우연하게 닥친 사건에 따라 감정적 대응이 달라진 겁니다. 애초에 본인이 어쩌지 못하는 일은 그냥 내버려 두고 자신이 하던 일 그러니까 강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감정 상할 일도 볼썽사납게 욕지거리 날릴 일도 없습니다. 그저 고요하게 마음밖에 둘 일을 자기 마음속으로 끌고 들어와 평지풍파를 만들었습니다.


강남역 그 사람의 스마트폰이 내게는 배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이 있다고 해서 강남역에 정물로 앉아 있어야 하는 사연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천 원짜리가 쌓이길 기다려야 하는 속사정은 그대로입니다. 통화를 하는 사람이 병든 노모든 아픈 아들이든 알코올 중독자 남편이든 누구든 간에 마스크로 눈을 가린 그가 매 순간 사회경제적 자살에 내 몰리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래서 가장 절실하게 스마트폰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다시 환승통로에 진입합니다. 주머니에는 천원 지폐 두 장이 들어 있습니다. 무심하게 앉아 있는 그녀가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소쿠리에 지폐를 넣으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스마트폰이 울립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던 걸 마치고 그녀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녀가 스마트폰에 대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밀려드는 인파가 만들어내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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