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절반과 잘 지내려면
당근거래가 쏘아올린 작은 공
1. 왜 ’여자용‘이라고 표시 안 해?
이따금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삽니다. 한동안은 공구와 가구에 꽂혔습니다. 고장 나거나 부서지지만 않았다면 쓰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중고거래에 딱 맞는 품목입니다. 괜찮은 물건을 푼돈으로 들여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자원 재활용에 참여하고 지구를 덜 소비한다는 뿌듯함은 덤입니다. 필요한 게 채워져 더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골프용품을 들여다봅니다. 애초에 중고 클럽을 얻어 쓰고 있는데 연식이 오래돼 하나둘 교체하고 있습니다. 새로 들여온 게 나와 합이 맞다 싶으면 기왕에 쓰던 걸 내놓는 거라 사고파는 게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 골프용품 거래는 내 주머니의 이해득실이나 지구적 이슈에 대한 소심한 동참과는 다른, 뜻밖의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내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입니다.
공구나 가구는 남성용, 여성용 구별이 없습니다. 원형톱은 원형톱, 직소는 직소일 뿐입니다. 책장은 책장, 탁자는 탁자일 뿐입니다. 성별에 따라 물건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클럽이나 파우치 같은 골프용품은 남녀용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남자용, 여자는 여자용을 씁니다. 민낯이 까발려진 건 이 대목에서입니다.
퍼터를 사려고 제목을 클릭합니다. 스펙을 보고 무심코 누르지만 제목에는 남성용 혹은 여성용이라는 표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상 게시물을 열었을 때 본문에 ‘여성용’이라고 적혀 있으면 짜증이 납니다. “왜 제목에 ’여성용‘ 표시를 하지 않은 거야?” 뇌까립니다. 남성용이면 당연한 듯 아무렇지 않게 넘어갑니다.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성용 표시가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을 잡고 룰루랄라 거래를 마칩니다.
이제 예전 퍼터를 팔 차례입니다. 파는 경우라고 살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에 길이, 모양, 제조사, 그립 상태를 자세히 적습니다. 그런데 막상 남성용이라는 표시를 빼먹습니다. 제목에도 깜빡하고 그냥 올립니다. 잠시 후 알아차리고 나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별 구별이 없다는 걸 당연히 남성용이라는 신호로 생각하는 겁니다. 살려는 사람 역시 남자용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래도 찰떡같이 서로 통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약속을 잡고 퍼터를 건네고 현금을 챙깁니다.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지만 물건의 성별에는 착오가 없습니다.
나나 상대방 머릿속 세상에는 남자만 있습니다.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여자는 곁다리일 뿐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고, EPL의 레인보우 캠페인을 지지한다고 목소리 높여 본들 모두 입바른 소리입니다. 내 안에 똬리 튼 전근대는 여전히 강력합니다. 물러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2. 맨스플레인
당근거래에서 남녀 표시에 대한 차이는 대화의 기술을 반영합니다. 사회심리학자 ‘제임스 W. 페니베이커’는 <단어의 사생활>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 비해 <나는>과 같은 1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는 비율이 훨씬 낮다. ~ 반대로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나(혹은 저)>라는 단어를 높은 비율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강자는 약자에게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약자는 강자에게 자신을 표시해야 하는 게 위계질서의 법칙입니다.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퍼터를 사고판 두 남자에게 ‘남자’는 강자이자 지배자이고, ‘여자’는 약자이자 피지배자입니다.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되도 않는 남성 우월주의의 허구를 꼬집는 말입니다.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친 이 말은 생긴 지 10년 남짓 된 신조어입니다. 여자들은 잘 모를 거라는 전제 아래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남자들의 행위를 가리킵니다.1)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칩니다. 심지어 가장 전문가인 여성에게도 가르치지 못해 안달합니다. 사실 처음 들었을 때 홀딱 벗겨진 느낌이었습니다.2) 삼남매 중 맏이로 자란 어린 시절부터, 결혼 후 소위 ’가장‘이 되고서부터 설명충이 아니었던 때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내와 이야기 할 때입니다.
아내는 몇 년째 집 근처 공부모임에 다닙니다. 햇수가 쌓여 공부가 깊어진 건 물론이고 단체가 운영되는 방식도 잘 압니다. 나는 오며가며 몇몇 분들과 눈인사를 나눈 것 외에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아침, 모임에 대해 이러저러 지적을 하고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뒀습니다. 말도 안 되는 밥상머리 잔소리를 듣고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아내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처음에는 진정성 있는 호의를 무시당한 것 같아 억울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관심도 정보도 없는 사람이 아는 척, 잘난 척, 젠 척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섣부른 지적과 훈장질이 남녀 차별과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부부는 남녀라는 차이 외에도 나이, 취미, 활동영역, 건강상태가 다릅니다. 뭐가 됐건 일방이 일방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건 둘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훼방놓을 뿐입니다.
둘이 함께 사는 동안 빚어진 몇몇 갈등의 원인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 물건을 올리면서 남녀를 표시하는 문제에서 보듯, 그리고 ‘맨스플레인’이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등재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나는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1)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2) 위키백과에 따르면, 맨스플레인은 용어 자체와 사회적 용례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남성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걸 전제로 설명하려 든다.‘는 원래 뜻으로 한정합니다.
3. 나만의 소극적 동등정책
페미니즘을 알지 못합니다. 일부러 검색해 본 뒤에야 시사용어 ‘이대남’이 뭘 뜻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이 둘이 벌이는 거대한 전쟁과 그 둘을 앞세운 협잡꾼들의 추잡한 전쟁 역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인가 싶다가도 그저 호사가들 입맛에 맞는 요깃거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잘 모르는 건 내버려 두고 대신 내안의 전근대와 싸우는데 집중하기로 합니다. 같이 사는 여자 사람인 아내와, 그리고 내 주변의 절반인 여자 사람인 사람들과 잘 살고 싶습니다.
오래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입니다. 한 장 한 장 놀라웠습니다. 정의(正義)에 관한 다양한 기준과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평등의 개념을 만났습니다. 능력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실과 끈기 같은 성품마저 태어나면서 혹은 성장과정에서 주어진 여러 조건이 결합해 만들어진 거라는 의미에서 임의적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결과를 오롯이 본인이 책임지거나 그 성과를 본인이 독식할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정의’는 성과를 나눔에 있어서 임의성을 최대한 배제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중 하나가 미국의 ‘소수집단우대정책’입니다. 텍사스 로스쿨에서는 소수자에게 최소 입학 정원을 할당합니다. 연방정부 보조를 받는 뉴욕 브루클린의 아파트 ‘스타렛 시티’는 반대로 단지 내 다수자인 흑인과 히스패닉의 입주 비율을 40% 이내로 제한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양쪽 모두 공동체의 다양성을 높여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사회적 선택입니다. 약자의 지위를 올리려면 세심한 정책적 고려와 오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글판에서 소수집단우대정책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원서에서는 ‘affirmative action’입니다. ‘적극적 우대정책’은 “(미국에서) 차별의 구제와 예방을 목적으로 인종·성별·국적을 고려하는 적극적인 노력”입니다1). 지금 한국사회와 내 주변에서 절반의 사람 ‘여자’는 여전히 약자이며 차별의 대상입니다. 이대남의 표를 타깃으로 한 모리배들의 ‘여성가족부’ 폐지 운운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퇴행의 신호입니다.
뒤늦었지만 개인적으로 적극적 우대정책, 적어도 소극적 동등정책이라도 펴야겠습니다. 섬세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공기처럼 익숙한 남성위주의 허위의식이 불쑥불쑥 튀어나올게 뻔합니다. 내가 선택하는 언어는 그 출발점 입니다. 심지어 ‘하느님 아버지’ 대신 ‘하느님 어머니’을 쓰자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2) 거기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당장 당근마켓 거래에서 ‘남자’ 표시를 빼먹지 않기로 합니다. 같잖은 맨스플레인을 당장 그만두기로 다짐합니다.
1) 다음 백과사전
2) 도덕경, 오강남
#맨스플레인 #당근마켓 #소수집단우대정책 #affirnativeaction #적극적우대정책 #남성우월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