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나절, 이웃집에 올라갔습니다. 부지런히 산을 넘어온 햇살을 등지고 비탈길을 천천히 걷습니다. 등짝과 뒷덜미가 금세 따뜻해집니다. 낯빛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가뿐해집니다. 겨우내 꽝꽝 얼었던 땅은 진작에 풀렸습니다. 잘 숙성된 밀가루 반죽처럼 폭신합니다. 지나온 자리마다 내 몸무게를 견뎌낸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도둑질을 하려면 땅 녹는 봄날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실없게 스쳐 갑니다. 느릿하게 걸으며 부드러운 봄을 한껏 받아들입니다.
<복수초> 작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봄기운이 오르면 복수초가 아른거립니다. 작년 이맘때 이웃집에서 처음 실물을 보고는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습니다. 햇살 좋은 마당에 도착합니다. 사람 안부는 뒷전이고 꽃 문안부터 챙깁니다. 어김없이 잘 피어 있습니다. 천상의 화가가 유화 한 점을 공들여 그려 놓았습니다. 꽃잎 하나하나 꽃술 하나하나 빛납니다.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칩니다. 술 대신 햇살을 한가득 받아 들었습니다. 황금술잔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한참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납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본 먼 데 산꼭대기에는 마지막 눈이 푸르게 빛납니다.
2. 좌망대
점심 밥을 먹고 기어코 개울을 건넜습니다. 딱히 뭘 해 보겠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피나물은 아직 철이 이르고 작년에 발견한 큰구슬붕이 군락지는 오월 초에야 꽃을 보여준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도 감자 이랑만 만들고 있기에는 봄볕이 너무 좋습니다. 밭 이곳저곳에 꽃다지꽃이 천지로 피어 있지만, 이웃집 복수초를 보고 난 후 스멀스멀 이는 시샘을 잡도리하기엔 도무지 역부족입니다.
<좌망대> 커다란 너럭바위위로 물이 흐릅니다. 작은 폭포 몇개가 연달아 있습니다.
너럭바위 폭포로 방향을 잡습니다. 아직은 휑한 나뭇가지를 지나쳐온 햇살이 편안하게 바닥에 내려앉습니다. 햇살을 깊게 들이킨 검은 흙이 차츰 지열을 올리면 숲은 절정의 향기를 내뿜습니다. 온갖 식물과 곤충과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품은 부엽토가 풀어내는 뭉근하고 곰삭은 향입니다. 푸석하면서도 촉촉한, 거친듯하면서도 야리야리한, 생동하는 썩은 내가 구수합니다. 이래야 봄입니다. 이래야 생명이 움틀 수 있습니다.
폭포 위 바위에 걸터앉습니다. 물소리는 거침없는데 바람은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추위는 지나갔고 더위는 오지 않았습니다. 성가신 날벌레는 물속에서 유충의 세월을 견디느라 아직 눈에 띄지 않습니다. 좋은 시절에 앉아 있습니다. 좌망대라 이름 붙였지만 머릿속은 잠시도 비어있질 못합니다. 온갖 잡념이 뒤엉켜 가닥가닥 쪼개지다 물거품처럼 흩어집니다. 애꿎은 커피만 홀짝이다 텀블러가 비어갈 즈음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작은 샛도랑을 건넙니다.
가파른 경사를 내달려 온 샛도랑은 본류와 만나기 직전에 계단식 웅덩이 몇 개를 연거푸 만들어 두었습니다. 멧돼지 목욕탕입니다. 한 칸에 한 마리씩 들어가기에 맞춤한 크기입니다. 깊은 산중 멧돼지가 1돈 1탕의 고급 목욕문화를 즐기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바로 그곳, 멧돼지 목욕탕이 내려다보이는 비탈, 큰구슬붕이 군락지를 이웃한 곳에서 노루귀를 발견했습니다.
<멧돼지 목욕탕> 얼추 4개가 보입니다. 한마리당 하나씩 차지하고 즐기는 멧돼지 전용 고급 목욕탕입니다.
3. 노루귀
부엽토가 살짝 덮여 있는 바위 위에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붙어 있습니다. 꽃대 하나에 꽃 하나, 이파리가 없어 더 여리게 보입니다. 숨이 멎는 기분입니다. 사정없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눈으로는 이곳저곳을 부산하게 훑어갑니다. 맙소사, 집단서식지입니다. 파란색, 보라색, 흰색의 작은 점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습니다. 마침 옅은 바람이 불어옵니다. 꽃대를 흔들고 꽃이 흔들립니다. 멧돼지는 이 좋은 꽃밭을 곁에 두고 우아한 산중 목욕을 즐겼던 겁니다.
욕심껏 눈에 채우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서성입니다. 갈등이 들끓습니다. 이렇게 많은데 한두 송이 데려가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집도 같은 산 같은 골짜기에 있는데, 뭐가 문제야? 아침에 본 이웃집 복수초가 다시 스쳐 갑니다. 노루귀를 데려가면 더이상 남의 집 복수초를 시샘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닙니다. 골짜기로 몇 발짝만 들어가면 볼 수 있는데, 굳이 마당에 들일 필요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한 번 더 돌아보고 마지막 눈맞춤을 합니다.
귀한 꽃을 만난 기쁨은 사라지고 가져오지 못한 아쉬움만 잔뜩입니다. 터덜 걸음에 어깨는 처졌습니다. 어리석은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얀색 노루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앞서 만난 군락지에서 족히 100미터는 떨어진 곳입니다. 외따로 딱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아, 한 송이가 따로 피어 있는 거라면 서식지 파괴는 아니잖아?' 합리화를 합니다. 조심스럽게 캐서 가방에 넣습니다. 다시 이동합니다. 20미터쯤 내려오는데, 이번엔 파란색 두 개체가 검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같이 데려가라는 계시처럼 느껴집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볕 잘 드는 골라 서둘러 심습니다. 물을 부어주고 흐뭇하게 내려봅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발길을 들이면 낭패라는데 생각이 미칩니다. 묵은 싸리나무 가지를 잘라 앙증맞은 금줄을 칩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찬 기운을 견뎌낸 노루귀가 쌩쌩하게 고개를 들고 햇살을 맞이합니다. 잘못되면 어쩌나 마음 졸였는데, 감사하게도 몸살 없이 뿌리내렸습니다. 마침 봄나물 캐러 나온 이웃들이 집에 들렀습니다. 보란 듯이 자랑합니다. 지천에 꽃이 널린 산골에서도 제일가는 자랑은 역시 꽃자랑입니다.
<폭설> 지금은 온갖 꽃들이 앞다퉈 피고 있지만, 정확히 2주전에는 폭설이 내려 차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저 눈이 녹은 자리에 복수초와 노루귀가 피었습니다.
* 꽃은 노루귀처럼 보이지 않지만 꽃이 지고 난 후 돋아나는 이파리가 노루 귀를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