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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Jan 13. 2023

콜센터

눈길을 어지럽게 걷지 않는 까닭

1. 도로연석


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식당을 나섰습니다. 멀지 않은 곳이지만 날이 덥고 습기가 많아 각자 차를 갖고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어쩌다 일행의 선두에 선 나는 질러 갈 요량으로 주차장과 도로의 경계를 이루는 연석을 그대로 타 넘었습니다. 내가 타는 차는 차고가 높은 SUV입니다. 웬만한 돌출은 차가 진행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아 평소에도 자주 하던 운전버릇입니다.


‘털썩’하고 바퀴와 차체가 도로 바닥에 떨어집니다. 가볍고 유쾌하게 추락하는 느낌을 만끽하며 별 탈 없이 연석을 내려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상한 낌새에 룸미러로 뒤를 힐끔 돌아봤습니다. 선두인 나를 따르던 차 한 대가 아무 생각 없이 연석에 올라타는 게 보입니다. ‘어, 어, 안 될 텐데’ 속으로 외치는 사이 차는 이미 도로바닥에 앞바퀴를 부리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차는 차체가 낮은 승용차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금속성 파열음이 들려옵니다. 연석 모서리에 바닥을 긁힌 차가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소리입니다. 승용차는 넘을 수 없는 경계를 탐한 죄 값을 톡톡히 치르고 말았습니다. 출고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새 차를 긁어먹은 주인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앞장서기를 잘못한 나 역시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野雪(들판의 눈)


穿雪野中去 눈 밟고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엔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今朝我行跡 오늘 아침 내가 간 발자국들이

遂爲後人程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雪朝野中行 눈 온 아침 들 가운데 걸어가노니

開路自我始 나로부터 길을 엶이 시작 되누나

不敢少逶迤 잠시도 구불구불 걷지 않음은

恐誤後來子 뒷사람 헛갈릴까 염려해서네


-「눈 내린 길 함부로 걷지 마라」(소명출판, 이양연, 박동욱) -



내가 오늘 만든 발자국이 훗날 뒷사람들의 길이 될 수 있으니 반듯하게 걸으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삐뚤빼뚤 어지러운 발자국을 뒤따르는 사람이 생길까 염려하고 경계하라고 합니다. 조선 후기 ‘산운 이양연’의 시입니다. 언젠가 읽고선 ‘기억해야지!’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늘상 까먹고 맙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일행이 새 차 바닥을 긁어 먹은 바로 그날, 누군가 내 뒤를 따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어야 합니다. 금방 녹아 없어질 눈길이라도 어지러이 걷지 말라는 옛 선비의 묵직한 고함소리를 되뇄어야 합니다. 훗날 뒷사람들의 ‘길’이 될 야무진 이정표를 놓지는 못하더라도 바로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발걸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은 만들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랬어야 했습니다.



2. 콜센터


전화벨이 울립니다. 15~~으로 시작하는 번호입니다. 일단 전화를 받으며 “여보세요” 건성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건너편에서는 빠른 속도로 잠시 시간을 내 주면 새로 나온 상품을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러라’고 한 다음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습니다. 전화로 일하는 상대방은 계속 자기 일을 할 수 있고, 나는 나대로 관심 없는 일에서 놓여나 딴 짓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거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서로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몇 분 뒤 저쪽에서 용건을 끝내면 내 쪽에서 종료 버튼을 천천히 누르면 상황이 마무리됩니다.


그날따라 진행하고 있던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쫓겨 일절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누군가에게 시간을 할애할 작은 틈조차 없습니다. 시간을 내 달라는 말에 “관심 없어요.” 라고 딱딱하게 말합니다. 상대방은 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소개할 상품을 놓치면 내게 얼마나 큰 손해가 될지 다다다다 읊어댑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뱉어냅니다. “관심 없다잖아요! 싫다면 그만둬야 할 거 아녜요. 전화 끊어요.”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거칠게 종료 버튼을 누릅니다. 전화 연결이 끊어진 뒤에도 손가락 끝에 매달린 짜증이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합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라디오에서 사연이 소개됩니다. 30년도 더 이전에 집에 큰 불이 났습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온몸 70%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말이 70%지 멀쩡한 곳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9살 때의 일입니다. 그날 불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아빠와 오빠가 있지만 왕래조차 끊겼습니다. 화상의 상처와 고통, 일그러진 피부를 안고 살아오면서도 30년 전 병원을 퇴원한 뒤로 치료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9살 어린 아이가 감당했어야 했을 아픔, 9살 이후 30년을 살면서 겪어온 고독과 좌절이 담담한 어조로 소개됩니다. 그때 리포터의 입에서 ‘콜센터’라는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흉터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한 때 콜센터에서 일했지만 상황이 악화돼 그마저 그만뒀고 지금은 몇 년째 직업이 없습니다. 콜센터는 마지막 직장이었습니다.


‘콜센터’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엊그제 걸려온 전화기 너머 무채색 목소리에 뒤늦게 살이 붙고 표정이 생겼습니다. 대기업의 이익을 강변하던 성마른 속사포가 아픔을 간직한 이웃의 사연으로 되살아났습니다. 누구나 받기를 꺼려하는 마케팅 전화에 숨겨진 간절함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퉁명스럽고 짜증스럽게 내팽개친 몇 분이 화상의 고통 속에 견뎌온 30년 세월로 치받아 왔습니다.


그날 매몰차게 대한 전화기 너머 상대방이 마치 사연 속 주인공인 것 같았습니다. 프로그램은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매주 목요일 진행하는 “사랑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코너입니다. 치료비에 보태려고 핸드폰을 누르는 손끝에 이번에는 미안하고 안타깝고 멍한 마음이 힘겹게 매달려 있습니다.


3. 대류


시인이 새 눈 내린 아침 들판을 어지럽게 걷지 않는 건 뒷사람을 생각해서 입니다. 혹시라도 나를 따르는 발걸음이 있을 때 함부로 찍힌 내 발자국 때문에 낭패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누군가를 위해, 설사 뒤따르는 이가 없을지라도 모름지기 반듯하게 걸음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애써 살피는 마음 씀씀이입니다.


내 뒤를 따르던 일행이 도로 턱에 차 바닥을 긁어 먹은 일이나 텔레마케터의 간절한 목소리를 건조한 기계음처럼 대한 건 맥락이 같습니다. 딴 사람이야 어찌됐건 내 알바 아니라는 겁니다. 내 편한 대로, 하던 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누군가로 인해 불편한 건 견디지 않겠다는 겁니다. 앞뒤 재지 않고 눈 위에 갈지자(之) 발자국을 어질러 놓은 샘입니다. 관심 부족이요 사려가 깊지 못한 겁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온도에서 삽니다. 설령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각자 느끼는 온도는 같지 않습니다.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려 고열로 고생하던 내가 느낀 집안 공기는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다른 식구들은 긴 팔 티셔츠 한 장 걸치면 그냥저냥 견딜 만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온도 캡슐 속에서 삽니다.


대류는 서로 다른 온도를 같게 만듭니다. 뜨거운 건 식혀주고 차가운 건 덥혀 줍니다. 대류를 통해 공기와 물은 결국 균형을 찾습니다. 서로 다른 온도에서 사는 사람 사이에서 대류가 일어나자면 우선 각자를 감싸고 있는 캡슐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캡슐을 터트리는 기폭제는 다름 아닌 나 이외의 누군가를 향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눈 내린 아침, 소복한 눈길을 걸으며 옛 시인의 일갈을 다시 듣습니다. “눈 밟고 들 가운데 걸어 갈 적엔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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