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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Feb 01. 2023

나의 일그러진 시간 사용법

시간의 밀도

내 삶을 공간적으로 나눠보면 의외로 단순합니다.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첫째 집입니다. 도시에 있는 집에서는 가족과 생활하며 식사를 하고 잠을 잡니다. 다음은 직장입니다. 주중 낮 시간을 보내는 이곳에서는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를 지불하고 돈을 법니다. 세 번째로는 시골입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에 내려가서 텃밭 농사를 짓고 오래된 집을 손보고 집 주변을 가꿉니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특이합니다. 바로 도로입니다. 출퇴근을 합해 매일 1시간여를 도로위에서 보냅니다. 시골에라도 다녀올라치면 왕복 예닐곱 시간 넘게 도로공사의 충성스러운 고객이 됩니다.


집과 직장과 시골을 무대로 살아가고 이 셋을 오가기 위해 도로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샘입니다. 앞의 세 군데가 생활공간 자체라면 도로는 세 곳에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유해야 하는 수단입니다. 여행자의 삶이 아닌 마당에 도로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비중이 적지 않지만 도로는 나에게 부차적인 공간입니다.




이상한 건 다른 곳에 비해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밀도가 높다는 겁니다. 적게는 30분 많게는 5시간가량 온전히 운전에만 집중합니다. 때로 라디오를 켜 두지만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잠시 잠깐 한 눈 팔지 않습니다. 시신경은 온통 차선과 차들과 갑작스럽게 튀어나올지 모를 돌발 상황을 주시합니다. 차창 밖에 스쳐가는 풍경은 말 그대로 망막을 스쳐갈 뿐 의미 있는 정보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한동안 운전에 몰입하고 나면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목적을 이룹니다.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목적지는 집과 직장 그리고 시골 셋 중 하나입니다.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빡빡하던 시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없이 느슨해집니다. 스위치를 켜듯 순식간에 모드가 바뀝니다.


집에서는 TV리모컨을 들고 빈둥거리는 게 일입니다.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채운다는 명분으로 아낌없이 방바닥 늘보가 됩니다. 몸뚱이를 뒹굴리고 머릿속은 비워냅니다. 책을 펼쳐보지만 관심은 곧 스마트폰과 TV화면으로 옮겨가고 책장은 좀체 넘어가지 않습니다. 야무지고 날쌔게 움직여야하는 직장에서조차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인터넷을 뒤지고 스포츠 중계를 보며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시골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텃밭농사랍시고 펼쳐놨지만 진즉에 ‘냅둬농’을 선언했습니다. 풀이 많아도 못 본 체하고 가뭄에 옥수수대궁이 말라비틀어져도 내쳐두고 토마토 가지가 축축 늘어져도 뒷짐 지고 지나칩니다. 넋 놓고 산과 나무와 시냇물을 바라보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 새와 바람과 물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채워 넣습니다.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시 운전대를 잡습니다. 풀렸던 나사는 여지없이 조여지고 물샐틈없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시골과 도시 집을 오갈 때는 밀도가 더욱 높아집니다.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 차 없는 고속도로에서는 과속을 일삼습니다. 엑셀에 발을 올려놓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제한속도가 훌쩍 넘어갑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계기판을 보고서야 ‘아차’ 싶어 발에서 힘을 뺍니다. 과속과 무단 차선변경을 밥 먹 듯해서 집과 시골에 도착한 다음에 하는 일이라곤 또다시 방바닥에 눌러 붙거나 어슬렁거리며 먼산바라기 하는 게 전부입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목적지에 따박따박 데려다주는 도로에서의 시간은 꽤나 효율적입니다. 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운전 중에는 온몸이 긴장되고 신경은 곤두섭니다. 운전대를 놓고 나면 피곤이 몰려옵니다. 고속으로 장거리를 이동한 뒤끝은 곱절로 지칩니다. 이동방편일 뿐인 도로에서는 한없이 밀도가 높고 목적지에서는 한없이 느슨합니다. 주객이 바뀌었습니다. 이상하고 일그러진 시간 사용법입니다.




매번 반성하지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집과 직장, 시골 생활의 태엽을 도로에서처럼 바짝 조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내도록 굼뜨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갑자기 템포를 바꿨다가는 호흡을 놓치게 되고 종내는 탈진하고 맙니다. 반성의 지향점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일상의 느린 속도를 도로로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무법자처럼 날뛰지 말고 얌전하고 천천히 다니자는 겁니다. 


곱씹어 보면 도로를 내달리는 건 질주본능 때문이 아닙니다. 아까워서입니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려다 보니 속도를 높입니다. 이제 생각을 바꾸기로 합니다. 호모 모투스(Homo Motus, 이동하는 인간)라는 말처럼 이동은 피할 수 없습니다. 직장뿐 아니라 도시와 시골을 정기적으로 오가야하는 다중 생활자에겐 더 그렇습니다. 여행자의 삶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나는 여행자입니다.


일상을 여행자로 살아야겠습니다. 여행자 모드가 되면 도로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집, 직장, 시골과 같이 내 삶의 중요한 공간이 됩니다.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 내버리듯 함부로 써버리는 게 아니라 아껴둔 곶감 빼먹듯 귀하게 다루게 됩니다. 지독한 시간 불균형이 해소되면 좋겠습니다. 안전은 덤입니다.


*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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