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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Feb 20. 2023

돌발변수에 대처하는 방법

변수가 곧 상수

변수가 곧 상수입니다

1. 망쳐버린 주말


산을 넘어온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길쭉한 빛 그림자를 만듭니다. 화목난로 온기를 느끼며 느긋하게 잠에서 깨어 몸을 비트는데 다용도실에서 낯선 소리가 들립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막을 때립니다. 바닥은 온통 물바다입니다. 급수 호스 끝에서 세탁기로 들어가지 못한 물이 쉭쉭거리며 새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멍하니 있다 급하게 수도꼭지를 잠급니다. 사나운 금속성 소리와 사방으로 튀는 물줄기가 멈춥니다. 사태파악은 아직이지만 직감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이미 눈치 채고 있습니다.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번 주말은 망쳤습니다.


한 겨울 시골에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창밖으로 눈 덮인 산과 나무를 내다보는 게 유일한 일입니다. 어느 것도 산중 고요를 깨뜨리지 못합니다. 1년 내내 높은 데시벨을 자랑하던 도랑물 소리는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몸을 낮춘 채 잦아듭니다. 먹이활동 하느라 부산스러운 해 뜰 무렵을 제외하면 새소리는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공기 흐름조차 멈춘 것 같은 적막 속에서 한껏 늘어질 욕심으로 밤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런 주말이, 눈앞에 와 있던 최대치의 게으름이 난데없는 물난리로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게다가 사람 부르기 쉽지 않은 깊은 산골입니다.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한동안 세탁기는 무용지물입니다.  


호스를 뺐다가 다시 끼워 맞추기를 몇 차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분으로 갖고 있던 호스를 가져다 끼워 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조립 불량이 아니라 부속이 망가진 게 분명합니다. 혼자 씩씩거리다 포기하고 바닥 물을 먼저 치우기로 합니다. 세간살이에 묻은 물을 닦아 한쪽에 치워두고 바닥에 흥건한 물을 걸레로 훔쳐냅니다. 한참 동안 쭈그리고 앉아 닦아내자 새로 단장한 듯 말간 바닥이 얼굴을 드러냅니다. 덕분에 물청소한 샘 치자며 허리를 펴는데 이번에는 창문과 천정에서 흐르는 물이 눈에 띕니다. 새어 나온 물이 수증기가 되어 천장에 들러붙었다가 중력을 이기지 못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뿌듯함은 사라지고 다시 걸레를 쥐어짜가며 닦아 냅니다. 마무리됐을 때는 점심때가 훌쩍 지났습니다.


예정에 없던 일로 진을 빼고 나자 허기가 집니다. 밥 짓는 시간을 기다릴 여가가 없습니다. 컵라면을 즐겨 먹지 않지만 서둘러 시장기를 때우자면 도리가 없습니다. 뜨거운 물을 붓고 한숨 돌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급수호스 연결 불량을 검색합니다. 찾아지지 않습니다. 사실 찾는다고 해도 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낙심하고 라면을 먹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먹었을까? 물을 마시려고 일어서다가 팔꿈치로 컵라면 통을 치고 말았습니다. 사방팔방 국물이 튀고, 몇 가닥 남은 면발은 초라하게 널브러집니다. 엎친 데 덮쳤습니다. 진작 사라진 주말의 여유가 한 번 더 줄행랑을 놓습니다. 마음은 온통 붉으락푸르락 엉망이 됐습니다.


* 몇 주 뒤 세탁기 수리기사가 다녀갔습니다. 동파가 원인입니다. 급수 호스 속에 있던 물이 얼면서 플라스틱 부속이 깨졌습니다.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2. 돌발변수


세탁기 고장이나 컵라면 엎지르기는 애초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예측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생긴 가변적 요인’을 ‘돌발변수(突發變數)’라고 정의합니다.(네이버 국어사전) 예기치 않은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행운’이라며 반길 테고 원치 않던 일이라면 ‘불행’이나 ‘불운’이 닥쳤다고 억울해 합니다. 주말에 일어난 두 사건은 한가하고 편안한 시간을 기대하던 나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돌발변수이자 몸과 마음의 평화를 깨트린 작은 불행입니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돌발변수가 끼어들면 일상은 변주됩니다. 얕은 구릉이 이어지던 밋밋한 들판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변화는 때로 나를 기쁘게 흥분시키고 때로 나를 좌절시키고 화나게 합니다. 야생 다래를 따기 위해 들어간 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산삼을 발견했을 때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밤새 멧돼지가 뒤집어 놓은 고구마 밭을 맞닥뜨린 어느 아침에는 말할 수 없이 속상했습니다. 세상 일이 기대와 예상대로만 움직인다면 맛보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더러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변수는 삶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사물들이 형체를 잃은  채 흐물흐물 울렁거리고 여기저기서 그 무엇이라도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다면 삶은 크게 흔들립니다. 예측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변수로만 둘러싸인 세상에서는 삶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변수를 제거하고 곳곳에 상수(常數)를 배치해 이정표를 삼는 이유입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상수는 앞일을 예측해 삶을 안정감 있게 꾸릴 수 있게 합니다. 갑작스런 일로 흥분해 심장이 날뛰는 걸 막고 좌절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인류가 오랜 기간 쌓아 올린 문명은 변수를 상수로 만드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김장 배추는 대표적인 투기성 작물이었습니다. 어느 해는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큰돈을 벌어다 주었고, 어느 해는 곤두박질 쳐 밭에서 썩어 나갔습니다. 투기를 바라고 농사를 짓는 농부는 드뭅니다. 폭락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폭등도 반기지 않습니다. 가격 불안은 농부로서 삶을 지탱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자재비나 인건비 같은 원가를 충당하고 농부 자신 땀 흘려 일한 대가를 어느 정도 거둘 수 있다면 마다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밭에서 키우고 있는 농산물이 수확되기 이전에 상인에게 통째로 판매(두산백과, 네이버)’되는 밭떼기거래가 고안됐습니다. 보험은 돌발변수로부터 삶을 지키기 위한 장치입니다. 날씨, 질병, 재해 같은 대형 돌발변수를 체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국가의 의무입니다. 국가가 이 의무를 방기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나는지 우리는 얼마 전에 보았습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걸 할 수 있게 되면서, 그러니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변수는 줄고 상수는 그만큼 늘어납니다. 예전에는 변수였던 것이 계획과 예측의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철학자 이정우 교수님은 ‘우연이란 우리의 무지에 불과’하고 ‘아직 모르고 있는 필연이 우연’라고 말합니다(「개념-뿌리들」그린비). 인과(因果)관계를 알지 못해 우연이나 운명 탓으로 돌렸던 일도 언젠가는 필연이 될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던져 마음먹은 대로 3이 나오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변수를 결과의 측면에서 바라본 게 우연입니다.


3. 변수라는 이름의 상수


줄어들고 있다고는 해도 변수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변수로만 둘러싸인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상수로만 된 세상도 불가능합니다. 인지 능력의 한계 때문에 예측가능성은 끝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측정에 관한 불확정성의 원리1)에 이르면 미시차원에서는 물리적 성질 자체가 불확실합니다. 고정된 것은 없고 오직 변화만이 본질입니다.(안개-체로금풍, https://brunch.co.kr/@piano1445/1) 그리고 변화 가운데는 우리가 원인을 모르거나 일어날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변화, 즉 돌발변수에 의한 변화도 있습니다. 진화 역시 돌발변수의 결과입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변수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 풍연’을 만들었습니다. 온갖 버그와 에러에서 알 수 있듯이 디지털세상이라고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상수는 우리가 상수라고 생각하는 한에서 상수일 뿐입니다. 변화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에서의 상수는 없습니다. 지구가 30억년동안 가꿔온 커다란 산이 어느 날 잘려나가고 바다가 흙으로 메워집니다. 지진이 일어나 하루아침에 지구의 모양이 바뀝니다. 세계를 양분해 호령하던 소련이 무너지고 서슬 퍼런 냉전이 붕괴됩니다. 평생 지켜오던 좌측통행이 어느 날 갑자기 우측통행으로 바뀝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시장’이라는 괴물 역시 영원불멸한 무엇이 아닙니다. 매 순간 모양을 바꿔가다가 종내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콘크리트는 부식됩니다.


이래저래 상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항상 변수가 있다는 것만이 피할 수 없는 상수입니다. 우리는 변수가 발생한다는 것을 상수값으로 놓고 삶을 설계해야 합니다. 모든 게 꽁꽁 얼어붙는 엄동설한에는 세탁기 부품이 동파될 수 있다는 것, 부품을 망가뜨린 얼음이 녹으면 수돗물이 솟구쳐 물난리가 날 수 있다는 것, 깃털처럼 가벼운 컵라면 용기가 언제든지 엎질러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렇다고 삶의 여정에 나쁜 변수만 있는 건 아닙니다. 달콤한 변수가 불현 듯 나타나 균형을 맞춥니다. 산삼 같은 큰 행운이 아니어도 나를 웃게 만들기에는 충분합니다. 무더운 여름, 느닷없이 불어온 산들바람 한 자락이 땀을 식혀줍니다. 막차에 지갑을 두고 내린 학생에게 선뜻 택시비를 건네준 버스기사 이야기는 당사자인 학생 뿐 아니라 사연을 전해들은 모두를 울컥하게 만듭니다.


변수를 상수로 둔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뒤통수 맞는 걸 줄일 수 있습니다.


1-1) 양자역학에서의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는 원리이다.~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운동량이 확정되지 않고,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 하면 위치가 불확정해진다.(네이버, 두산백과)

1-2) 불확정성의 원리는 말 그대로 확실하지 않다는 원리이다. ~ 불확정성 원리는 측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측정하고자 하는 입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성질에 기인한다.(네이버, 물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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