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금풍(體露金風)
중도말촌(中都末村, 주중엔 도시, 주말엔 시골)의 삶이 2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골로 가는 길은 꽤나 먼 거리에 막판엔 거친 비포장 길도 있습니다. 한겨울엔 눈 때문에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평안감사도 제가 싫으면 고역입니다. 반대로 본인이 좋으면 산골 오지도 먼 줄 모르고 험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려 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운이 넘쳐 3 시간여를 쉬지 않고 달립니다.
도착하면 청소부터 합니다. 빗자루 질은 집과 교감하는 의식입니다. 아파트에 비해 시골집들은 개성이 뚜렷합니다. 못 하나 전등 하나 사연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전 주인이 집을 짓고 살면서 쌓아온 내력에 내 손 때가 덧붙여져 이야기가 되고 추억이 됩니다. 비새는 지붕을 교체하고, 동파(冬破)된 수도 배관을 새로 까는 큰 공사 말고도 집은 자잘한 손길을 계속 요구합니다. 지금도 흙과 나무로 된 벽체 곳곳에 햇살과 바람과 벌레가 드나드는 틈이 있습니다. 게으른 탓에 몇 달째 못 본 채 하지만 곧 손을 보면서 사연하나를 보태야 합니다.
바닥을 쓸면서 심호흡을 합니다. 나를 따라 온 내 정령과 대들보에 앉자 집을 지켜온 집의 정령이 서로 인사하고 포옹합니다. 시골에 왔다는 신호가 온몸으로 감지되면 심장박동은 여유를 찾고 말초신경은 긴장에서 풀려납니다. 몸과 마음이 기분 좋게 이완되면 천천히 밖으로 나갑니다.
대부분은 텃밭에서 보냅니다. 텃밭은 풀과의 싸움터입니다. 봄에 움트는 새싹은 천지사방에 생기를 몰고 오지만 곧 백만, 천만, 억만 대군이 되어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란 걸 배우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용을 쓰고 애를 끓여 보지만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면 대게 항복합니다. 내가 심어 둔 작물이 키 큰 풀밭 어딘가로 사라지는 경험은 마법 같습니다. 가을이 되어 풀이 스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은 평화를 얻게 됩니다. 가을바람은 내게 금풍*(金風)입니다.
마음으로는 포기한다지만 몸은 그러질 못합니다. 흙을 뒤집고 이랑을 만들어 씨를 뿌립니다. 모종을 사다 심기도 합니다. 풀을 잡고 유인 끈을 묶고 물을 주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납니다. 일을 마칠 때쯤이면 땀에 젖은 온 몸에 흙이 범벅이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옷을 벗어 흙을 탈탈 털어 내고, 샤워를 합니다. 냉기 가득한 찬물을 끼얹으면 무더위와 노곤함이 순식간에 가십니다.
식사는 주로 텃밭에서 나는 것들로 차려 먹습니다. 서툴기도 할뿐더러 전(前) 처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준비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먹을 때도 천천히 오래 먹습니다. 원체 느리기도 하지만 쫒기 듯 후다닥 먹어 치워서는 하늘과 땅과 물이 키워낸 식재료 하나하나를 충분히 느끼며 흡수할 수 없습니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자리에 눕습니다. 일체의 인공조명에서 온전히 풀려나면 우주로 확장되는 나를 발견합니다. 어느 시공간인들 우주를 벗어날 수 없지만 밤은 내가 우주적 존재라는 사실을 살갗에 닿는 바람처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나뭇잎을 희롱하는 달그림자를 따라 시선이 흔들리고 우주의 기원인 빅뱅을 찾아 은하수를 헤매고 다닙니다. 물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지만 깊고 푸른 밤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 金風 : 가을은 방위로 서방(西方)에 해당하며, 서쪽은 오행 중에 금(金)에 해당하므로 시문(詩文)에서 가을바람을 지칭할 때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여기서는 풀을 잡아 주는 고마운 바람이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 낮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천체인 태양은 지구에서 광속으로 8분 거리밖에 안되지만 가장 가까운 별인 켄타우로스 자리 프록시마 조차 4년이나 걸립니다.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음 놓고 농땡이를 부릴 수 있고 맥없이 비 구경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서둘러 처마 밑에 나앉습니다. 비는 나뭇잎을 두드리고 바위를 때리고 흙을 적십니다. 잠시 후면 지붕에 내려앉은 비가 처마로 흘러내립니다. 하늘과 땅이 다르지 않다는 걸 웅변하듯 물은 텅 빈 허공을 끊임없이 채워갑니다. 계곡물이 금방 불어납니다. 밤새 퍼붓고 난 다음날이면 검붉은 흙탕물이 덮칠 듯 사납게 쓸려 내려갑니다. 우르르 쾅쾅 바윗돌 구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겸손해집니다.
비가 그치면 안개 차례입니다. 들마루에 앉아 멀리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을 바라봅니다. 안개가 춤을 춥니다. 단조로운 비에 비해 안개는 변화무쌍합니다. 능선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상하를 불문하고, 골짜기를 따라 좌우로 무진합니다. 길게 꼬리를 물더니 어느새 몽글몽글해지고, 그러다 산허리를 돌아 금세 자취를 감춥니다. 사라졌는가 하면 나타나고 나타났다 싶으면 줄행랑을 놓습니다. 잠시도 멈춰있는 법이 없습니다.
안개가 필 때면 사위는 고요합니다. 비온 뒤라 새들도 잠잠하고 바람도 아직은 골짜기 깊은 곳에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개울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도 풍경을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안개가 노는 걸 보고 있으면 음성이 소거된 영상을 보는 착각에 빠집니다. 한여름 안개는 더욱 매력적입니다. 짙은 녹음을 배경으로 움직임과 생멸(生滅)이 한결 선명합니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것 같습니다.
집이 교묘하게 자리 잡은 덕에 안개는 대부분 먼 곳에서 피어납니다. 피부에 직접 닿을 일이 없습니다. 지난여름이었습니다. 웬일인지 내가 앉아 있는 들마루까지 안개가 치달아 왔습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안개는 텃밭과 나무와 바위를 지워버리더니 단숨에 모든 걸 삼켜버렸습니다. 살갗에선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안경에 들러붙은 습기는 시야를 가립니다. 걸음을 옮겨봅니다. 물속을 걷듯 흐느적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숨이 가빠지는 착각에 빠질 무렵 골짜기 끝에 숨어있던 바람이 일어 한순간에 환해집니다. 안개 걷힌 눈앞에 맑은 세상이 나타납니다.
안개는 이른 새벽 산책길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가까스로 비껴 난 비포장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갑니다. 새벽안개는 풀 섶에 물방울을 앉혀 놓고도 아직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마와 콧구멍 가득 찬 기운이 감각되면 발걸음은 가뿐하고 감정은 고조됩니다. 피부호흡을 하는 양서류처럼 볼에 묻어나는 물기를 통해 생기를 빨아들입니다. 이럴 때 안개는 나에게도 생명이 됩니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도시와 시골의 이중생활자인 내가 시골에서 지내는 날은 한 달이래야 고작 며칠뿐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시골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오직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제자가 운문선사에게 묻습니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는 말합니다. “가을바람에 온전히 드러났느니라.[체로금풍, 體露金風(벽암록 제27칙)” 온전히 드러나는 본체는 잎이 떨어지고 목질만 남은 나목(裸木)이 아닙니다. 고정되고 확고한, 그래서 변함없는 그 무엇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뭇잎 스스로 가지에 연결된 맥을 끊어 떨어지는 과정 자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새봄에 물을 끌어 올려 잎을 틔우는 생동의 기운, 해와 물과 양분으로 잎을 무성하게 하고 꽃을 피우는 한여름의 성취, 두꺼운 껍질에 움츠린 체 봄을 준비하는 엄동설한의 인고 모두에 내재되어 있는 그것입니다. 같은 나무이면서 매 순간 다른 나무가 되는 것, 무상(無常)이 바로 본체입니다.
무상이 본체라는 건 세상에 상(常)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변함만 있고 변함이 곧 실체라는 겁니다. ‘나’는 한순간도 ‘나’ 아닌 적이 없지만, 한순간도 ‘나’인 적이 없습니다. 음식을 먹고, 신진대사를 하고, 호흡을 하면서 나는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됩니다. 25년이면 사람 몸의 모든 세포가 바뀐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지금의 나는 25년 전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내 생각’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내 생각인 건 없었고 영원히 바뀌지 않을 내 생각도 없습니다. 태(胎)중의 아기나 갓난아기가 생각을 갖고 있을 리 없습니다. 20년 후에도 지금과 똑 같이 생각할 리도 없습니다. 있긴 있는 데 끝없이 바뀌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것, 이게 무상입니다.
‘영원’한 우주조차 생성과 사멸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천체물리학자들은 빅뱅으로 탄생한 우주의 나이를 137억 년으로 계산하는데 앞으로 1000억년이 지나면 소멸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다른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에 고정된 건 없어!” 당연한 말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지혜의 결핍, 즉 무지(無智)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무상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흔히들 도를 깨친다고 하는데, 무상을 통찰하는 걸 뜻합니다. 무상이 쉽다면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까닭도 없고, 무상을 깨닫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할 이유도 없습니다. 수행만 하는 스님들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도에 닿을 수 있습니다.
무상이 본체이긴 하지만, ‘상’을 짓고, 그 ‘상’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그 무엇도 없게 됩니다. 나도, 너도, 이것도, 저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혼돈입니다. 개인으로나 인간 종으로나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카오스에서 벗어나자면 어떻게든 ‘상’을 짓고, ‘나’를 특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형체를 갖추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상’을 떠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살아집니다.
문제는 그렇게 지어진 ‘상’이 무상을 밀쳐낸다는데 있습니다. 애초부터 상이 본체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덧없는 세상 너머에 있는 확고하고 변함없는 실체를 찾아 헤맵니다. 불멸의 사랑과 영원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를 최고로 칩니다. 한 발 더 나가 무상을 기피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흔들리는 걸 싫어합니다. 늘어나는 주름에 서글퍼하고 ‘내 생각’이 침해되는 걸 거부합니다. 어느새 ‘상’만 바라보고 삽니다.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겁니다.(전도, 顚倒).
그러다 본체인 ‘무상’과 맞닥뜨리면 당황합니다. 가을이 우수와 허무의 계절이 된 건 본체로 알던 무성한 나뭇잎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상향이 허물어지는 걸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나를 투사해 인생무상을 이야기합니다. 인생무상이란 말에는 ‘상’에 대한 무망한 기대와 그로인한 허무감(虛無)이 잘 베여 있습니다. 무상은 허무의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상이 일순간에 불과하고 변하는 것만이 본체임을 안다면, 가을낙엽에서 무상을 보는 것과 같이 이른 봄 새싹에서도 무상을 볼 수 있다면, 주객전도(主客顚倒)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상에서 허무감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긴 7년을 땅속에서 보내고 지상에서 노래하는 시간이 고작 1주일이라고 하여 매미를 딱하게 여길 일도 없습니다. 애벌레든 성체든 순간을 살뿐 어떤 상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살고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도시는 ‘상’으로 가득합니다. 사람을 제외하면 생명 있는 것을 마주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디를 보더라도 우리 눈은 콘크리트, 아스팔트, 쇳덩어리, 플라스틱, 유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주조차 생멸하는데 콘크리트라고 무상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무딘 눈과 시간관념으로 콘크리트의 무상성을 잡아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어제와 같고, 1년 후라 해도 지금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허공에는 개념어와 이름씨들로 가득합니다. 저마다 자신을 주장하고 영역을 넓히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로부터 만들어 진 상에 사로잡혀 오늘의 나를 괴롭히고, 추상적인 ‘미래’의 상에 저당 잡혀 지금의 나를 희생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의식이 있습니다. 엄격한 형식을 갖춘 큰 행사도 있지만, 기도나 절, 노래처럼 언제든지 가볍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일상적인 의식을 통해 종교적 가르침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까이 접하지 않으면 어떤 금언도 잊히고 맙니다. 콘크리트 가득한 도시에서 무상을 오감으로 체득하는 건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습니다.
시골은 ‘무상’으로 넘쳐납니다. 풀은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 있습니다. 흙속에서는 수많은 벌레들이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동시에 부패와 분해를 통해 또 다른 순환에 참여합니다. 연못에 넣어둔 물고기는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처마 밑에서 죽어가는 새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지금 내 발들을 스쳐가는 시냇물은 항상 같은 물이지만 조금 전 내 발등을 스쳐간 그 시냇물이 아닙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태양의 고도가 변하는 것을 보고 공전을 실감합니다.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벌레가 기어 다니고, 죽어있는 벌레가 굴러다닙니다. 흙벽에선 가루가 떨어지고, 통나무에선 전에 없던 벌레 구멍이 새로 생겨납니다. 건조한 봄날엔 흙과 나무의 이음새가 벌어지고, 습한 장마철엔 나무로 된 문틀이 불어나 창문을 여닫기에 힘이 듭니다.
안개를 볼 때는 내가 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과 기압을 따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생성을 기뻐하지 않고 소멸을 덧없어 하지 않습니다. 산을 가렸다가는 놓아 주고, 가두었던 나를 주저 없이 풀어줍니다. 봄 꽃 향기를 실어 나르고 여름 대기의 열기를 식혀줍니다. 가을이면 안개를 따라 단풍이 내려앉고, 안개가 걷히면서 개울물은 하늘을 닮아 깊어집니다.
어리석은 내가 안개 속에서나마 무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건 다행입니다. 안개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중도말촌은 큰 즐거움 입니다. 다시 가을이 다가옵니다. ‘무상’을 되새기되 ‘허무’하지 않은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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