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을 전문으로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에 따르면 표범 얼굴에 점점이 박힌 무늬는 개체마다 다릅니다. 사람 손가락 지문이 제각각이듯 둥근 무늬로 표범 1, 2, 3을 구분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같은 무늬는 없고 같은 표범은 없습니다.
사람 얼굴도 다 다릅니다. 생김도 다르고 표정도 다르고 주름이며 느낌도 다릅니다. 어느 한 사람 얼굴의 특징을 찾으라고 하면 누구나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그러니까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하는 무언가를 쉽게 짚어 낼 수 있습니다. 천 개의 얼굴을 놓고 보더라도 1부터 천 번째 얼굴까지 별다른 고민 없이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기한 건 내 얼굴입니다. 단체사진 속에서 내 얼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나'라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는 내 얼굴을 잘 모릅니다. 나를 제외한 천 개의 얼굴은 알겠는데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내 얼굴의 특징은 쉽사리 잡히지 않습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누군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내가 모르는 여러 목소리와 섞어 무작위로 들려주었을 때 내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내 얼굴과 목소리를 구분해 내지 못하는 건 세상을 보는 기준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제외한 대상물은 '나'라는 프리즘을 거쳐 내게 다가옵니다. 프리즘은 그곳을 통과하는 대상물 각각의 특징을 부각시켜 다른 것과 쉽게 구별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프리즘 안쪽에 있는, 프리즘을 운영하는 주체인 '나'는 프리즘을 거치지 않습니다.
프리즘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는 나에게 아무것도 없는 무(無)입니다. 순수한 물이 무색무취인 것처럼 나는 나를 제외한 다른 모두에 대해 색깔 없고 냄새 없고 모양 없고 맛이 없습니다. 물을 기준으로 다른 사물의 색과 냄새와 모양과 맛을 정하듯 '나'는 다른 대상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일 뿐 판단과 평가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입니다. ‘나’와 ‘나를 제외한 모두’로 이루어진 이분법 세상에서 세상을 보는 절대적인 기준인 나는 ‘나’를 좀체 알아보지 못합니다.
“보는 일을 하는 ‘보는 사람’을 볼 수는 없다. 듣는 일을 하는 ‘듣는 사람’을 들을 수는 없다. 생각하는 일을 하는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할 수는 없다. 지각하는 일을 하는 ‘지각하는 사람’을 지각할 수는 없다.” (「브라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야지나발키아 - 「축의시대」, 카렌 암스트롱 인용)
2. 이해 못할 세상
"이해를 못하겠어."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먼 곳이거나 오랜 옛날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누구도 쉽사리 내 '이해'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TV에 나오는 가공의 ‘캐릭터’들은 누구랄 것 없이 내 욕받이가 되고, 길가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열에 아홉은 내 심기를 거스르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라고 해도 예외가 되지는 못합니다.
바깥세상은 프리즘을 거쳐 나에게 들어올 때 자국을 남깁니다. 프리즘 안쪽에 있는 내 영혼이 무색무취하고 순백인 까닭에 프리즘을 거친 그 무엇도 흔적 없이 내게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때 외부세계가 남긴 자국을 보며 ‘이해 못해’ 라고 소리칩니다. 더러는 그 자국이 나를 해치는 까닭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욕을 당한다거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해코지를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데도 그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단지 그 사건이 우연히 내게 다가왔고, 내 영혼에 흔적을 남겼다는 이유로 얼통당토 않은 대접을 받습니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열을 내고, 다른 지방의 독특한 생활양식에 과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오이나 땅콩을 못 먹는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누군가의 성적 정체성과 취향을 백안시합니다. 나라걱정, 세태걱정, 그 사람 앞날을 걱정하는 것처럼 치장하지만,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에게 딱 맞는 바깥세상은 없습니다. 음식과 약제는 모두 독(毒)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소위 법제(法製)라는 것은 이로운 기운을 얻으려고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다듬고 찌고 삶고 굽고 말리는 모든 과정이 법제입니다. 법제를 거쳐야 비로소 부작용이 없어지고 내 몸을 보하는 양식(糧食)이 됩니다.
독(毒)이라는 말 자체가 자기중심적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고유한 속성을 유지하고 생존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 독특한 성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물질적인 성분이 내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칠 때 우리는 ‘독이 있다’고 합니다. 순전히 내 입장에서 내리는 상대에 대한 평가입니다. 프리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경우입니다.
사람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맘과 같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내 기준에 딱 맞아떨어질 수 없습니다.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다른 행동에 불편해하고 터부시하는 건 무엇이든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타인과 바깥세상이 자신에게 가해오는 모든 자극을 독이라고 선언하고,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해 법제를 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세상을 이해 못 할 것투성이로 ‘이해’하는 폭력입니다.
3. 미친놈이거나 답답한 놈이거나
강요와 폭력은 상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에게는 현실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이를 윽박지르고, 아내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때에 따라서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화를 냅니다. 일상의 갈등으로 구체화되는 겁니다. 가족이 아니라면, 건성건성 대하면서 관계가 깊어지는 걸 피합니다. 외면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관계를 단절해 버리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는 왜소해지고 삶은 불만으로 채워집니다.
30여 년 전이었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인도를 내달리는 오토바이를 보고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왜 저러지? 저런 거 보면 화가 나서 돌아버릴 거 같아.”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말했습니다. “그만한 일에 그렇게 흥분하면 앞으로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 친구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해 못할 것들로 에워싸인 나는 세상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애를 먹습니다.
운전을 할 때면 나를 제외한 다른 운전자는 두부류로 나뉩니다. 우선 ‘미친놈’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칼치기를 하거나 뒤에서 꽁무니를 바짝 따라 붙는 차를 보면 예외 없이 ‘미친놈’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다른 운전자를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일 없이 저 혼자 빠르게 달려나가는 자동차도 입방아에 오릅니다. ‘뭐가 급해서 저래? 미친 거 아냐?’ 단지 나를 앞질러 갔다는 게 이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의심받는 이유입니다.
느린 운전자는 ‘답답한 놈’이 됩니다. 제한속도에 미치지 못하거나 ‘겨우’ 제한속도에 맞춰 달리는 사람들은 ‘답답한 체증유발자’가 됩니다. 2차선 도로에서 나란히 정속주행을 하는 두 대를 보면 ‘운전을 어디서 저따위로 배웠어?’ 라며 욕을 합니다.
도로위의 미친놈이나 답답이는 내 기준에서 그런 겁니다. 나도 추월을 하고 과속을 합니다. 딴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 뒤차가 눌러대는 경적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내가 앞질러가는 사람에게 나 역시 ‘미친놈’이고,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에게 나 역시 ‘답답한 놈’이 됩니다. 그런데도 내 속도, 내 운전습관에 맞춰 끊임없이 누군가를 정신줄 놓은 사람으로 만들고, 운전 솜씨 어설픈 교통 방해꾼 취급을 합니다.
4. 달라이라마의 선글라스
달라이라마는 이를 두고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본다고 합니다. 나는 나만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통해 보이는 세상을 참 세상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함부로 비난하는 건 선글라스가 씌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프리즘 안쪽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무색무취하다고, 무결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달라이라마는 자기의 진짜 본질을 이해한 사람을 선글라스를 낀 사람에 비유한다.”(「붓다의 심리학」, 마크 엡스타인)
운전자를 미친놈 취급하거나 ‘이해 못해’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거나 가족이나 동료를 가자미눈으로 노려보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더군다나 나는 평생 선글라스를 벗을 수 없습니다. 선글라스를 벗는다는 것, 다시 말해 프리즘을 버린다는 건 세상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절대자의 지위를 내려놓는다는 걸 뜻합니다. 자아를 허물고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불가에서는 무아를 최고의 경지로 치지만 속인에겐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무너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번 생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결국 일천한 경험과 얕은 지식과 변덕스런 감정과 근거 없는 애증의 굴레에 매인 채, 그게 나라고, 그렇게 보이는 게 세상 전부라고 우기며 살아갑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는 걸 매 순간 떠올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도 아내도 친구도 동료도 저 멀리 바다 건너 있는 어느 누구도 자기 선글라스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걸 깨닫는 것뿐입니다. 절대자의 지위를 포기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발 물러나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상대를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객관화된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선글라스와 프리즘에 의한 왜곡이 조금이라도 바로잡힌 곳입니다.
5. 개구리 연못에 둥둥
<물과 낙엽> 낙엽 그림자에 실버라인이 생겼습니다. 물과 낙엽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외부세계, 즉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남긴 흔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마음에 생긴 자국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혹은 이해못한다고 소리치지 말고, 혹은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혹은 그것 때문에 상대를 괴롭히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마음은 금세 균형을 얻고 일상의 평화로 되돌아갑니다. 순간의 자극에 내키는 대로 반응하면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상처받을 뿐입니다.
지난해 여름이었습니다. 밭일을 하다가 땀을 식히려고 연못가 나무그늘에 앉았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물에 가득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새소리와 바람마저 잦아든 산골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고 일체의 움직임이 사라진 연못은 고요했습니다. 그때 무당개구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을 완전히 뺀 채 사지를 늘어뜨리고 물에 떠 있었습니다. 개구리와 물이 만나는 곳에 생긴 장력을 통과한 햇빛이 연못 바닥에 실버라인을 만들 정도로 물은 개구리를 밀어내지 않았고 개구리는 물을 흔들지 않았습니다. 물과 개구리는 한 몸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가 떠올랐습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든다. 퐁당!" (마쓰오 바쇼)
하이쿠는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드는 것으로 끝나지만, 다음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보고 있는 것, 개구리와 연못의 구분이 사라진 장면입니다. 개구리가 뛰어들면 연못은 파장으로 요동칩니다. 균형을 잡기위해 개구리도 부지런히 팔다리를 놀려야 합니다. 소란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길지 않습니다. 잠깐 시간이 흐르면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하나였던 것처럼 고요와 평화를 얻습니다.
프리즘을 거쳐 내게 남겨진 자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질감으로 낯설어 하지만 곧 내 일부가 됩니다. 그저 고요하게 마음 바깥에 둔다면 괴로움을 피하고 갈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물에 뛰어든 개구리가 사지를 늘어뜨리는 데 필요한 잠깐의 시간이면 됩니다.
“개구리 연못에 퐁당 개구리 연못에 둥둥”
<개구리 대신 나뭇잎> 사진 찍겠다고 부산을 떠는 바람에 개구리는 가버렸습니다. 개구리가 떠난 자리에는 풀잎 몇개가 남아 개구리를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