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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Oct 08. 2020

빗자루

마음쓸기


오랫동안 잊고 있던 빗자루를 가까이 하게 된 건 벌레 때문입니다. 처음 시골집과 인연을 맺었을 때 나는 온갖 벌레와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노린재, 집게벌레, 지네, 놀래기, 돈벌레, 파리, 초파리, 모기, 벌, 개미, 거미, 풍뎅이, 딱정벌레, 날도래, 나방 심지어 귀뚜라미까지, 철마다 종류를 달리하며 때로는 무더기로 때로는 각개로 출몰했습니다. 그놈들을 우선으로 처치하지 않고서는 차 한 잔, 물 한 모금 마시기 어려웠습니다.


청소기를 쓸 수도 있겠지만 진공으로 빨아들인 유기물 덩어리를 먼지봉투에 저장(?)해야 한다는 게 께름칙했습니다. 살아있는 녀석들은 더 찜찜했습니다. 대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었습니다. 죽어 널브러져 있거나 기어 다니는 벌레를 때로는 그냥 쓸어 담고, 때로는 때려죽인 다음 쓸어 담아 창을 열고 털어냈습니다. 긴 전깃줄에 매달린 청소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 보다 훨씬 간편했습니다. 빗자루는 그렇게 생활로 다가왔습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 할인점에서 파는 싸구려 프라스틱 제품. 손잡이에는 손때가 묻고, 털은 색이 바래고 마모되었지만, 오래쓰다 보니 정이 들었습니다.

벌레와 씨름하는 동안, 비새는 지붕을 고치고 창틀 풍지판(風止版)을 갈아 끼웠습니다. 물과 바람을 잡기 위한 건 데, 덤이 따라왔습니다. 벌레가 사라진 겁니다. 드글데던 벌레는 옛말이 되었고 시골생활은 그만큼 여유로워졌습니다. 더러 살아있는 녀석들이 눈에 띄긴 해도, 산채로 붙잡아 넓은 세상에 놓아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끔입니다. 그럴 때면 일체 중생 생명의 크기가 다를 수 없다며, 참 방생(放生)을 실천한 거라며 짐짓 뿌듯해하기도 합니다. 사체(死體)도 드뭅니다. 시골에는 벌레가 많지만 모든 시골집에 벌레가 많은 건 아닙니다.


더 이상 벌레는 없지만, 시골에 갈 때면 습관처럼 빗자루로 하루를 시작하고 빗자루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빗자루는 헛심 쓰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듯 깨끗해 보여도 비질 한번이면 먼지와 검불, 머리카락, 그리고 잘려진 벌레의 머리며 다리, 더듬이와 날개가 일 열로 끌려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일 때면 빗자루가 이것들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가 싶기도 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하다가도 피식 웃고 맙니다. 밭으로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통에 흙투성이가 된 옷을 입고 드나들었으니 집안 곳곳에 흙부스러기와 지푸라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흙과 나무로 만든 집에 벌레 역시 없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바닥을 쓸다 보면 언젠가 TV에서 본 스님들의 마당 쓸기 울력이 생각납니다. 절집 너른 마당에 사선으로 늘어 선 스님들이 긴 빗자루를 들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 발짝씩 옮길 때마다 마당은 빛이 납니다. 어지러운 발자국과 나뭇잎이 사라지고 정연한 빗자루 자국만 남습니다. 오래전, 이른 아침에 찾아간 통도사에서는 그렇게 단장한 마당위로 향 내음이 흘렀습니다. 빗자루가 만들어낸 곡선에 비스듬한 햇살이 내려앉아 빗살무늬가 선명했습니다.

<전리품> 빗자루과 지나가면 먼지와 벌레와 흙부스러기와 검불이 모입다. 빗자루는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절에서 마당 쓸기는 마음 쓸기라고들 합니다. 마당과 마음은 닮았습니다. 마당은 애초에 빈 공간으로 조성되지만 그 비어있음은 채움을 위해서입니다. 비어있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고양이가 드나들고 바람이 돌아 나갑니다. 꽃향기가 내려앉고 새소리가 떠돕니다. 빗방울이 튀기고 눈발이 쌓이고 녹습니다. 무상(無常)을 설하며 퇴색한 나뭇잎이 굴러다닙니다.


채운다고 해도, 붙박이는 없습니다. 어느 것도 주인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잠시 머물다 빈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무언가가 주인이 된다면 이미 마당이 아닙니다. 문제는 흔적입니다. 발자국이 남고 낙엽이 남고 소리와 향기의 잔영이 남습니다. 온갖 그림자가 어지럽게 방황합니다. 스님들이 비질을 하는 건 어제의 흔적을 지움으로서 오늘의 채움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우기 위함이요, 비움으로서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마당은 항상 비어있고,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이 그렇습니다. 흔히들 내 마음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내 마음이었던 건 없습니다.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오직 텅 빈 마음뿐입니다. 그 빈 공간에 온갖 마음들이 채워집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옳고 그른 분별,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 아름답고 추한 느낌, 행복하고 슬픈 기분이 들어옵니다. 바라고 시기하고 욕하고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격정이 채워집니다.


대부분 잠시 머물다 빠져나가는데 때로 나가지 못한 마음들도 있습니다. 주로 부정적인 감정과 기분들이 그렇습니다. 즐거움은 잠깐이지만 괴로움과 슬픔은 오래갑니다. 오랫동안 나가지 못한 마음은 나를 병들게 합니다. 습(習)이 되어 주인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감정이 마음을 꽉 채워 새로운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때, 꼰대가 됩니다.


치워지지 않은 찌꺼기가 탈입니다. 마음에도 비질이 필요한 건 그래서입니다. 고여서 썩어가는 마음을 쓸어내고, 무딘 마음은 벼리고, 날카로운 마음은 두루뭉술하게 여며야 합니다. 새 마음이 들어올 수 있게 빈자리를 마련해 두면 꼰대가 되는 걸 늦출 수 있습니다. 마당을 쓸며 마음을 쓸라는 건 그런 뜻입니다.


깨끗해 보인다고 비질을 멈추면 머잖아 방바닥에 동글이검댕먼지가 굴러다닙니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귀엽고 깜찍하게 그려졌지만, 유쾌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바닥은 방바닥 보다 쓸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매 순간 찌꺼기는 생겨납니다. 들여다보며 쓸고 닦지 않으면 검댕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래저래 비질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빗자루 #마당쓸기 #마음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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