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동네 축구 모임에 찾아간 건 무엇보다 ‘시간’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시간에 겁박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1주일 단위로 삶을 구성합니다. 쳇바퀴 돌 듯 한다며 지겨워 하지만 사실 이 방식은 시간과 대척하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週, 月, 年으로 시간을 쪼개고, 쪼개진 틀 안에서 생활을 설계할 때, 시간은 무한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삶을 살아내는 배경일 뿐입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週의 마법이 풀리면 시간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흠집하나 없이 매끈한, 그래서 손에서 미끄러지기 일쑤인 스테인리스 봉 같은 시간 앞에서는 전후 구분이 사라지고, 내가 어느 시간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인위적인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역설적이게도 절대적인 시간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방향 없는 우주에 떠 있는 하나의 점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인위적인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역설적이게도 절대적인 시간의 감옥에 갇혀버리는 걸 의미합니다.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시간 이곳저곳에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주말마다 회합을 갖는 조기 축구는 봉제선 없는 내 시간에 눈금을 만들기에 제격이었습니다. 규칙성과 반복성의 아늑한 품으로 돌아온 나는 비로소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매주 모임에 참가하는 것으로 매듭이 생겼다고 해도 삶을 3차원으로 만든 건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가입한 축구팀은 대부분 중년이었습니다. 40대 초반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머리 희끗하고 더러 배도 나온 사람들이 땀에 젖은 몸을 부대끼며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뒤풀이에서 기울이는 막걸리 잔은 직선인 시간을 구부려 윤곽을 만들어 주었고, 몸과 마음이 부딪히며 여기저기 보풀이 생기자 내 일상에는 질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리 근육이 야물어지고, 출렁이던 뱃살이 줄어든 건 오히려 덤이었습니다.
“중년 사람들이 새로운 준거집단을 만나는 것,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인생의 가장 큰 전환기에 클럽을 만났습니다. 어울려 공차고 웃고 마시면서 자칫 힘들어 질 수 있었던 시기를 견디는 힘이 되었습니다.” 클럽은 내게 많은 걸 주었습니다.
2년 반 만에 탈퇴했는데, 우선 주말 마다 할 일이 생겨서입니다. 훗날을 기약하는 일이라 미루거나 거를 수 없는데, 주말에만 가능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 후로 대부분의 주말을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부상입니다. 무릎에 탈이 났습니다. 큰 충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뛰기는커녕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무언가에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저려왔습니다. 통증을 핑계로 한두 번 빠지기 시작한 게 몇 개월이 되었고, 계절이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내 축구 인생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2. 아픈 무릎과 살아가기
한동안 신경 쓰면 통증은 완화되었습니다. 그러다 잠깐 방심에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족구를 한다고 나섰다가 딱 한번 공을 건드린 대가로 몇 개월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개울가에 내려갔다 자갈돌을 헛딛는 바람에 도지기도 했습니다. 박약한 기억력을 한탄하며 한의원도 가보고 양방병원도 다녀보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 생활은 바뀌었습니다. 조심조심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뿐 아니라 경사로에서조차 동작이 부자연스럽고 신중해졌습니다. 무엇보다 느려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느린 축에 속했는데, 아프다는 걸 핑계 삼으니 맘 놓고 느려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느려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느린 축에 속했는데, 아프다는 걸 핑계 삼으니 맘 놓고 느려질 수 있었습니다.
행동이 굼뜨니 아픈 다리와 상관없이 사람자체가 느슨해진 느낌이 듭니다. 예전보다 더 더디게 먹는 바람에 다른 분들은 식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내가 밥 먹는 모양을 지켜봐야 합니다. 원래도 눌변이지만 지금은 말하는 게 더 만만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생각하는 것도,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도 빠릿빠릿하지 못합니다.
달리기나 장거리 등산은 더 이상 꿈꾸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못한다 해도 서운할 게 없습니다. 달리기는 축구할 때, 등산은 20대 시절 원 없이 했습니다. 가끔 생각이 나더라도 예전 기억을 곱씹으면 됩니다.
책상다리로 앉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불편합니다. 워낙에 입식보다 좌식을 좋아 했는데, 아픈 다리를 맘대로 구부릴 수 없으니 앉으려면 어색한 자세가 됩니다. 아픈 오른쪽 다리를 쭉 뻗어 앉으면 되는데, 폐 끼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도 입식 테이블만 찾습니다.
이정도 불편은 생활을 꾸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걱정은 무릎 통증이 고질병으로 주저앉아 가벼운 산행(山行)이나 산책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겁니다. 버섯이며 산나물을 조금씩 얻는 생활 산행은 텃밭 농사와 더불어 내가 계획하는 노후(老後) 경제의 중요한 축입니다. 이게 안 되면 설계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느릿느릿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아 하는데 아직은 겁이 납니다. 몇 번 맞은 연골주사가 효험이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3. 아픈 무릎이 남긴 것
생활패턴이 바뀌고 느려진 걸 처음엔 그저 아픈 무릎 탓이겠거니 했습니다. 나이 드는 과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한참 지나서입니다. 살면서 여기저기 병들고 고장 나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먹는 행위 자체와 먹을 것을 얻기 위한 활동,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외계와의 접촉이고, 이 과정은 어쩔 수 없이 질병과 사고를 수반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질병과 사고의 숲을 그만큼 오랫동안 헤쳐 왔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무릎을 다친 것조차 살면서 겪게 되는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리고 부상 때문에 행동이 굼떠지고 우유부단해진 게 아니라 그럴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았습니다.
생각이 노화(老化)에 다다르자 몸과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당신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마음도 거기에 맞추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피크가 지났으니 오늘이 남은 인생에서 가장 건강하고 가장 활력이 넘치는 때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내 몸이 가야할 길은 내리막입니다.
육체와 정신이 엇박자를 치면 사고가 생깁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은 마음이 몸을 앞서가서 넘어 지고, 중년이후 사람들은 마음이 몸에 뒤쳐져서 넘어집니다. 무릎 부상도 그래서 온 겁니다. 정신이, 뇌가 이미 간 데 없는 젊은 몸을 붙들고 산 대가입니다. 이제부터는 나이 든 몸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불편한 무릎이 내게 보낸 첫 번째 신호입니다.
이제부터는 나이 든 몸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불편한 무릎이 내게 보낸 첫 번째 신호입니다.
아픈 다리를 끌고 거리를 나서 보면, 세상은 온통 ‘정상인’들만의 세상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얕은 경사로며 도로 연석도 힘들게 합니다. 6차선, 8차선 도로를 건널 때는 절반도 지나지 못 했는데 초록신호가 깜빡거려 허둥대고 맙니다. 특히 좌우로 경사가 심한 인도를 걸을 때는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아프긴 하지만 내 다리로 걷는데도 이런데, 휠체어나 양손 목발에 의지해 지나간다면 넘어지기 딱 좋게 되어 있습니다.
한 때 지하철마다 에스컬레이터 공사한다고 부산떠는 걸 마뜩찮게 여긴 적이 있습니다. 횡단보도 바로 위에 육교를 만들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이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편한 것만 추구하는 습성쯤으로 여겼습니다.
이동권을 주장하기 위해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오체투지로 기어가던 장애인 시위대의 모습을 오래 전에 봤지만 그들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5%에 이른다는 사실도 각인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게도 직접 겪어 본 뒤에야 세상에는 ‘정상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공감능력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예전의 나라면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을 두고 나온 두 가지 기사를 보고도 의아했을 겁니다. 비밀번호가 노출되는 걸 막으려고 혼자 사는 여성들이 도어락에 랩을 씌우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서울시가 이들에게 안전장치를 공급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남자 사람인 내가 1인 가구 여성들이 겪는 공포를 ‘이해’하긴 여전히 어렵지만 지금은, 그럴 수 도 있겠다 싶고 잘하는 정책이지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아픈 다리가 내게 보내는 두 번째 신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아픈 다리가 내게 보내는 두 번째 신호입니다.
4. 무용지용(無用之用)
아스팔트 갈라진 틈새에 어렵사리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민들레를 보고 내가 말했습니다. “어쩌다 저기에 씨가 떨어져 고생스럽게 꽃을 피우나?” 듣고 있던 아내는 “밭 가운데 있었으면 진작 뽑혔을 텐데, 아스팔트라서 꽃도 피우고 씨도 날릴 수 있는 거 아냐? 저기가 더 나아 보이는데.” 합니다. “못생긴 나무가 고향산천 지킨다.”는 옛말하고 같습니다. 곧고 잘생긴 나무는 쓰임새가 많아 일찌감치 잘려나가지만, 구부러지고 뒤틀린 나무는 그 덕에 천수를 누립니다.
「장자(莊子)」에서는 이를 두고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라고 했습니다. 사물의 어느 일면만 보고 쓸모 있다 없다 판단하는 게 섣부르다는 지적입니다. 흙도 물도 없는 아스팔트 틈새는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유전자를 보전하려는 민들레에겐 오히려 좋은 쓸모가 되었고, 휘어지고 뒤틀린 나무는 인간에게 쓸모없음이 나무 자신의 장수를 위한 쓸모가 되었습니다. 무릎을 다친 후 내게 온 세 번째 신호입니다.
중국 명나라 스님 ‘묘협’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으로 정리했습니다. 10가지 금언으로 되어있는데 첫 번째가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一, 念身不求無病)”입니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십상이니(身無病則貪欲乃生)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以病苦爲良藥)”고 합니다.
축구클럽에 발길이 뜸해진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니 살은 물러지고 근력은 쳐집니다. 무릎을 다친 건 불편하고 힘들지만, 고통은 나를 돌아보고 타인을 살펴보고 세상 보는 눈을 새롭게 합니다. 쓸모없는 부상이 내게 끼친 쓸모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습니다.
무릎을 다친 건 불편하고 힘들지만, 고통은 나를 돌아보고 타인을 살펴보고 세상 보는 눈을 새롭게 합니다.
ps : “연기란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불교를 철학하다」 이진경) 이 말에 따르면 세상 모든 것은 맥락을 떠날 수 없습니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쓸모’는 ‘지금’, ‘여기’, ‘나’를 기준으로 합니다. ‘지금’, ‘여기’, ‘나’를 떠나면 새로운 기준이 들어섭니다. 어쩌면 ‘쓸모’를 말하는 게 가장 ‘쓸모’없는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