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와 경계를 이룬 육지가 내륙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백두대간을 앞두고 거친 산세를 박차고 오를 힘을 모으느라 이곳저곳 숨겨진 골짜기에서 잠시 숨을 고릅니다.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 그 수많은 골짜기 중 하나에 시골집이 있습니다. 깎아지른 절벽이 먼 데 앞산을 이루고, 백두대간의 꿈틀대는 능선을 든든한 뒷배로 삼았습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집 옆 개울물은 갈수기에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인적 드물고 사시사철 물이 넘치는 시골집 골짜기는 고라니가 터줏대감입니다. 영어 이름이 ‘Water Deer(물사슴)’일 정도로 고라니는 물을 좋아하고, 물가에 터를 잡고 삽니다. 그래도 직접 마주치는 일은 드뭅니다. 산에 갔을 때 서리태 같은 까만 똥으로 존재를 확인해 주거나 짝짓기 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누가 이 땅의 주인인지 알려줄 뿐입니다. 밤늦은 시간 차로 이동하는 도중에 더러 길가를 어슬렁거리는 실물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긴장하고 놀랐지만 몇 번 겪다 보니 데면데면합니다. 저는 저고 나는 나입니다.
비공식 임대차 관계 역시 매년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짐승들의 땅에 세 들어 사는 값으로 우리 부부가 공들여 작물을 키워 상납하면 고라니는 애초부터 제 것인 양 느긋하게 별식을 즐기고, 답례로 텃밭 여기저기에 거름을 뿌려주고 갑니다. 그래도 집과 텃밭은 사람 영역이고 산비탈과 능선은 동물의 땅이라는 구분은 비교적 명확했고, 잠시 경계를 넘나들기는 해도 서로의 영역은 존중되었습니다. 불가근불가원의 신사협정 아래 관계는 무난했고 갈등은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2023년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봄부터 시골집 방문을 거르는 일이 잦았습니다. 어느 초여름, 밤늦게 도착해 달게 잠을 자고 아침 일찍 텃밭을 살피러 나갔습니다. 인공 경작지에서 자연 목초지로 되돌아간 듯 풀이 마구 자란 밭은 형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허리춤까지 자란 쑥과 개망초를 헤치며 나아가는데, 어디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납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살피려는 찰나, 작은 동물 두 마리가 부리나케 뛰쳐 달아납니다. 고라니입니다.
지난봄 한 배에서 태어난 햇내기들인지 고만고만한 크기의 어린 개체들입니다. 사람 발길이 줄어들어 텃밭이 풀밭으로 변하자 아예 자리를 잡고 눌러앉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풀밭 어딘가에 녀석들의 탯줄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난데없는 인간의 출현에 단잠 자던 고라니도 놀랐겠지만 잘 유지되고 있던 ‘한 팔 간격(at arm’s length)’의 관계가 깨진 현장을 목격한 인간도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고라니가 머물던 곳은 몸뚱이를 동그랗게 말아 누인 듯 풀이 오목하게 눌려 있습니다. 둥지입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새끼 고라니를 따라 풀밭을 헤치고 뛰어갔습니다. 여긴 내 공간이라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시위했습니다. 오더라도 잠자리를 만들어 눌러앉는 건 아니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관계가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며 쫓아갔습니다. 부탁은 소용없었고, 한번 깨진 협정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텃밭 여기저기에서 잠자리가 발견됐고, 몇 번이나 더 새벽이슬을 털어내며 달아나는 고라니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텃밭엔 고라니 똥이 부쩍 늘었고, 매년 늦가을 마지막 수확 때까지 잘 붙어 있던 고춧잎이 작년 가을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고라니는 텃밭에서 잠을 자고 먹거리를 해결하고 볼일을 봤습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덧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이’, 그러니까 식구(食口)가 되어 있었습니다.
2. 폭설
유난히 눈이 많은 겨울입니다. 뉴스에서는 눈 덮인 동해안 마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주말을 다니러 왔던 어느 날 우리 부부 역시 고립될 뻔했습니다. 쌓인 눈을 치우기 전에는 탱크조차 다니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정전까지 겹쳤습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러진 나뭇가지가 전깃줄을 간섭해 일어난 일입니다. 정전은 난방과 수도뿐 아니라 통신마저 끊어버립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 화목난로와 개울물에 의지해 다시 자연인 놀이를 해야 할 판입니다. 다섯 시간 동안 눈을 치워 길을 튼 다음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도중에 차 바퀴가 눈에 빠지기라도 하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됩니다.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눈 많은 어느 겨울날의 특별한 추억담이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치도록 켜켜이 쌓인 눈은 겨우내 녹지 않고 있습니다. 산과 들이 눈에 덮이면 짐승들은 사람 이상으로 힘들어집니다. 우선 이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가늘고 긴 다리로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옮겨 다니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눈에는 작대기로 찔러 놓은 듯한 작은 구멍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고라니 같은 사슴과 동물이 지나간 흔적입니다. 차가운 눈에 배를 끌고 다닌 듯 발자국을 따라 쓸린 자국이 길게 나 있습니다.
어치밥이 된 옥수수
무엇보다 먹을 게 없습니다. 몇십 센티가 넘게 쌓인 눈밭에 마른 풀잎 하나 있을 리 없습니다. 고욤나무는 여름 내내 다닥다닥 키운 열매를 직박구리에게 몽땅 내주고 진즉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2년 동안 처마 밑에 탈 없이 매달려 있던 옥수수 두 송이는 이번 겨울 마침내 어치 밥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화단에 심어둔 키 작은 반송은 어떤 짐승의 먹이가 되었는지 가지 끄트머리가 봉두난발입니다. 산짐승 날짐승 할 것 없이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노루를 본 것도 이번 겨울이 처음입니다.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무심코 던져둔 시선에 둥둥 떠다니는 노루궁뎅이버섯이 들어왔습니다. 노루입니다. 하얀 털뭉치처럼 생긴 꼬리를 엉덩이에 달고 다니는 노루는 멀리서도 고라니와 쉽게 구별됩니다. 이튿날은 집 마당까지 들어와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갔습니다. 인기척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산책하는 폼이 한두 번 다녀본 솜씨가 아닙니다. 흔하게 마주치는 고라니에 비해 산꼭대기나 능선에 사는 노루를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기하고 반가워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돌이켜보니 좋아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식지를 버리고 올 정도로 먹이가 부족하다는 신호였습니다.
(왼쪽) 하얀 털뭉치를 엉덩이에 달고 있는 노루 (오른쪽) 처마 밑 고라니 똥
겨우내 눈이 녹지 않으면서 집은 고라니와 노루의 똥자리가 되었습니다. 눈을 피해 처마 밑으로 들어온 차에 일을 본 것인지, 똥 눌 자리를 찾아 처마 밑까지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처마 밑은 온통 똥밭입니다. 전에 없던 일입니다. 발 디딜 곳 없는 똥 무더기를 보며 올 농사 거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실없게 듭니다. 치우자니 콩알만 한 똥을 일일이 긁어모으는 게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고 그냥 두자니 구린내와 너저분해 보인다는 낭패감이 교차합니다. 사방팔방 눈밭이라 당장은 치울 수도 없습니다. 눈이 녹은 뒤라야 뭐라도 할 수 있습니다.
새들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동틀녘이면 새소리에 잠을 깨고, 창밖만 내다보아도 온갖 새들이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눈을 피해 어디 먼 곳으로 간 것인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고욤나무를 쉴 새 없이 드나들던 직박구리는 몇 주째 발길을 끊었습니다. 곤줄박이, 붉은머리오목눈이, 박새 같은 작은 새들 쉬어가라고 창가에 세워 둔 횃대 역시 주인을 잃었습니다. 쌀알을 한주먹 올려 뒀지만 오랫동안 날갯짓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하루는 높은 하늘을 맴도는 매 한 마리와 처마 밑에 걸린 빈 옥수수 송이를 찾아 헛걸음한 어치 한마리를 본 게 전부입니다.
3. 향을 피우다
연휴를 맞아 다시 시골집을 찾았습니다. 입춘, 우수 다 지나 경칩이 목전입니다. 남쪽에서는 매화며 생강나무꽃 소식이 들려오고, 복수초와 바람꽃 사진이 SNS를 장식합니다. 이곳은 언감생심입니다. 양지 음지 할 것 없이 눈이 두꺼워 사륜구동 아니면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합니다. 바짝 긴장한 채 눈길을 뚫고 도착해 주변을 살핍니다. 밭에는 고라니를 물리치느라 둘러둔 울타리 높이까지 눈이 차올랐습니다. 안팎의 경계가 사라진 울타리를 가로질러 발자국 여러 줄이 어지럽습니다. 뭐라도 건지겠다고 눈밭을 헤집고 다녔을 수고로움이 헛헛합니다.
한참 동안 눈을 치워 차 세울 자리를 마련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전기 코드를 찾아 창고 쪽으로 가다가 멈칫합니다. 저 앞 모퉁이에 어렴풋이 널부러저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일이 터졌다는 직감에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심호흡만 되풀이합니다. 일없이 장작을 옮겨놓으며 딴청을 부리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엔 고라니 사체가 놓여있습니다. 내 집 처마 밑에 커다란 포유동물이 죽어 있습니다. 주변 맨땅에는 털이 날리고, 눈밭에는 핏자국이 선명합니다.
몇 년 전 너구리를 봤을 때와는 충격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때는 집에서 떨어진 밭이었습니다. 너구리는 온전했고, 눈 없이 포근한 겨울이어서 근처 산으로 옮겨 묻어줄 수 있었습니다. 흙을 꾹꾹 눌러 밟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라니는 너구리보다 훨씬 큽니다. 그것도 처마 밑에서 훼손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측은지심 이전에 참혹한 광경에 고개가 저절로 왜로 꼬아집니다. 천지사방 깊은 눈밭이라 옮기기도 어렵고 땅을 파고 묻는 건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동물 사체를 처마 밑에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우물을 먼저 손보기로 합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눈을 치우고 뚜껑을 엽니다. 계기판을 들여다보면서도 정신은 고라니에게 가 있습니다. 왜 하필 내 집에서 험한 꼴을 보이는 건지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어?’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일이 더디기를 바라지만, 야속하게 수돗물은 금세 콸콸 쏟아집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뒷다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립니다. 속을 다 파먹힌 탓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장딴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정신없이 끌고 가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립니다. 그런데, 거기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 하루나 이틀쯤 되었는지 훼손되지 않고 온전합니다. 나란히 뉘어놓고 보니 크기가 같습니다. 엄니가 자그마한 어린 수컷들입니다. 그제야 지난해 텃밭 고라니들이라는데 생각이 미칩니다.
내 집 밭에 탯줄을 묻고 밭을 잠자리 삼아 살던 녀석들입니다. 온 밭에 똥을 싸지르고 천방지축 날뛰던 놈들입니다. 상추며 도라지꽃, 옥수수, 고춧잎을 나와 1년 내내 나눠 먹은 식구들이 눈 쌓인 비탈에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한참을 내려다보다 장화 속에 들어간 눈이 녹아 발이 차가워질 때쯤 돌아섭니다. 아내가 말없이 소주 한 병과 불붙인 향을 건네줍니다. 고라니가 누워있던 자리에 향을 꽂고 소주를 뿌립니다. 우연찮게 맺어진 인연을 태우고 씻어냈지만 고라니 두 마리와 폭설의 기억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