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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란 Sep 16. 2020

띠동갑 언니에게 반말을 해보았다

수평어, 존재 자체를 바라보게 되는 마법

나에겐 아주 사랑스러운 모임이 하나 있다. 우리는 조직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은 새롭게 자리를 찾아 나선 이들과 현재의 자리를 선택한 이들로 나뉘어 있어 매일같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채팅방을 통해 자주 서로의 안부를 나눈다. 다행히도 1년에 한 번은 진득하게 시간을 보낸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구성원은 막내인 나부터 띠동갑 차이 나는 언니까지, 구성원의 나이 스펙트럼이 꽤 넓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애칭을 부르며 반말을 한다. 취지를 생각하면 반말보다는 '수평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반말도 아니고 수평어?

수평어는 자유학교에서 처음 알게 된 개념이다. 2017년 겨울,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쉼과 전환을 위한 안전한 실험실이라는 곳. 자기 이유를 찾아 나서는 곳 자유학교." 그때의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매일을 보내고 있던 시기라 광고에 마음을 빼앗겼다. 일은 시작했는데 내 마음 같지 않은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을 때니까. 어쨌든 나는 이 곳에 2017년에 입학해 2018년에 졸업했다. 2주 일정이었다. 갓 스무 살부터 5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인 학교. 이들과 인사를 나누자 마자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 곳에 모인 우리는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겠구나.


자유학교에서 처음으로 수평어를 경험했다. 이 곳에 온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제안되었고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로의 나이도, 본명도 모르는 사람들과 2주간 반말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건 꽤 어색한 일이었다. 심지어 부모님 또래의 사람에게도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해야 한다니!! 졸업할 때까지 수평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나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그때의 기억이 아주 오랫동안 좋은 실험으로 남아있었다.


세대 차이가 아니라 존재의 차이

한국에서는 유독 나이에 따라 역할이 부여된다. 처음 만난 상대와는 당연히 나이를 기준으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10대에는 학교에 대해, 20대에게는 취업과 연애에 대해, 30대에는 결혼에 대해, 40대에는 출산에 대해. 그런데 수평어를 통해 서로의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면 질문이 달라진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고민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또 대답할 기회를 얻는다. 세대, 권력, 권위에서 벗어나 존재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옛날 사람이라서 그렇구나", "어려서 그렇구나"가 아니라 "이 사람은 이렇구나"


우리 수평어 써볼까?

나의 모임은 3년 전, 친구들을 할머니네 집으로 초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적으로도 친밀한 동료, 서로에게 호감은 있지만 아직 어색한 동료, 서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동료까지. 일곱이 모였다. 모두 동그랗게 둘러앉은 할머니네 집 거실에서, 이 곳에서 만큼은 서로를 별칭으로 부르며 수평어를 써보자고 제안했다. 동료들은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고, '나이도 한참 어린 애가 반말을?' 이란 생각에 당황했을법한데 말이다.


수평어를 쓸 수 있었던 이유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에 대한 애정과 배려,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한 명이라도 이 모임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거다. 또 하나는 우리가 서로를 자주 부를 만큼 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서로에 대한 호칭이 굳어진 사이에서는 수평어로의 전환이 어렵다. "언니" 혹은 "선배", "선생님" 등 호칭에서 이미 위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뼈 속까지 유교사상이 새겨진 나에겐 그렇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한 호칭이 정착하기 전에 시도해보면 좋다. (사람은 봐가면서 제안하셔야 합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물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대적 배경의 차이를 자각할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건방져도 되나?"생각하지만 잠시 뿐이다. 우린 친구니까. '친구'와 '건방지다'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니까.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한다. 존재 자체에 열린 마음을 갖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세상의 갈등 절반 정도는 사라지지 않을까? 본디 친구란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무한히 응원하게 되는 법이니까.


ps. 친구들 나랑 놀아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나 마흔 살 돼도 놀아줘야 해. 알겠지?

<일상기획자의 실험실>은 바라는 일상과 현재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실험을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더라도 바라는 것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다보면 삶이 더 풍성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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