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습관을 넘어 세상을 향한 태도로 확장되는 채식 여정
계속 채식할 거야? 계속 고기 안 먹으려고?
채식을 한 지 2년이 흘렀다. 간혹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묻는다. 채식 계속 할거냐고. 그러게 나 진짜 계속 채식할 건가? 우선 지난 2년간의 채식을 자축하며 회고해보기로 했다. 뭐든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니까.
2018년 가을, 채식영화제에서 요리사 요나의 토크 프로그램을 듣게 됐다. 채식영화제는 내가 운영진으로 참여해 만든 영화제였음에도 스스로는 고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맛있으니까. 그런데 토크에서 요나가 지나가는 말로 한 문장으로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시에서 사는 것이 무척 바보같이 느껴진다. 어떤 채소가 어떤 계절에 맛있는지, 어떻게 나고 자라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늘 시골 출신임을 자부해 왔는데 실제론 제철 채소가 뭔지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 마트에는 사시사철 늘 신선한 채소들이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토크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자꾸 내가 도시의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리곤 더 이상 도시에 갇혀 계절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곤 다음날 아침, 언니와 애인이 있는 자리에서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언니는 우리가 격주로 방문하던 청량리 곱창집 이름을 언급하며 "여기도 안 간다고? 너가?", "내일이면 고기 먹을걸?"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나와 삼겹살 집 도장깨기를 하던 애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삼겹살도 안 먹을 거야?"라고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아무도 나의 선언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채식을 시작하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모르는 사람들과 3박 4일간 지리산에서 먹고 자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사전 설문조사를 통해 내가 페스코 채식인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이 것이 어떤 정상성에서 벗어나 '특이'사항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관심이 쏠리진 않을까 못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나는 환대를 경험했다. 스무 명의 인원 중에서 한 사람을 위해 약 10번의 식사에서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주던 섬세함,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채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대의 의미로 같이 채식을 한다는 동료까지. 덕분에 나는 불안함은커녕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나는 어떤 무리에서 채식인이란 사실을 알리는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누군가 처음의 나처럼 헤매고 또 불안해하고 있다면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연대의 용기를 가지게 됐다. 채식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의 연대를 배웠고, 새로운 동료를 얻었다.
내가 조금만 아프다고 하면 우리 아빤 "고기를 안 먹어서 그렇다"며 아쉬운 감정을 드러낸다. 아빠의 잦은 잔소리 때문인지 체력이 달리는 게 느껴질 때면 나도 모르게 "고기를 안 먹어서 그런가?"하고 불쑥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기를 먹을 때 보다 몸이 가볍다. 훨씬 에너지 넘칠 때도 많다. 책이나 영화를 봐도 고기가 건강을 유지해준다는 믿음은 그저 믿음일 뿐. 사실이 아닌 걸 아니까.
그래도 고기를 안 먹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걱정시키는 일은 경계하고 싶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채식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조금 더 건강한 삶을 살아내고 싶어서 선택한 거니까. 특히 고기만 안들었지, 기름지고 밀가루 폭탄인 음식들만 먹고 다니다 응급실에 다녀온 후로는 건강이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됐다. 건강한 채식인이 되기 위해 하는 일 중 첫 번째는 영양제(비타민과 유산균)를 챙겨 먹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요가다. 채식을 하다 보면 나의 몸을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되는데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채식 덕분에 비춰지는 몸이 아니라 기능으로서의 몸에 집중하게 됐다.
나는 식사만큼은 외주화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단호한 사람이었다. 음식을 만들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더 값지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채식을 하고 나선 밖에서 사 먹기가 쉽지 않았다. 뭐가 들었는지 이 것 저 것 묻다 보면 서로 피곤해지고, 경계의 눈빛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건"으로 이름 붙은 것들은 왜 죄다 비싸게 파는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생존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다음날 도시락을 싸기 위해 매일 주방에서 우당탕탕 반찬을 만들었다.
그런데 서울에 혼자 사는 자취인이자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하루 2시간은 너무 컸다. 음식을 해 먹을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더 많은 콘텐츠를 보고 인사이트를 얻어야 하는 건 아닌지 초조했다. 그리곤 깨달았다.
내 몸과 환경을 지키는 일은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구나.
미친 듯이 노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곳, 서울에서 가난한 채식인인 나는 아주 큰 벽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벽은 너무나 견고해서 지금까지도 나의 숙제로 남아있다.
채식을 하고 나서는 새로운 세계로의 확장이 일었다.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맛있겠다"는 1차원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식재료가 키워지는 건강한 환경과 씨를 뿌리고 돌보는 농부의 노동권까지도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채식을 한다는 건 어쩌면 지구의 요소들을 하나로 연결지어 볼 수 있는 신비한 약을 먹게 되는 것 같다. 마치 보건교사 안은영이 럭키와 혼란 사이를 잇는 젤리를 보듯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 단절된 것들을 발견하고 다시 잇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채식 덕분에 나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디뎓다.
사람이라면 매일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내게 채식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다. 이제는 개인적으로 채식을 잘해나가는 것에서 나아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역할에 방점을 두고 싶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how 두유 do?(카페에 두유 옵션을 제안하는 챌린지) 와도 연결되는 이야기일 텐데, 우리에게 더 넓은 선택지가 있다면 채식의 허들은 분명 낮아질 테니까. 이제 막 시작한 프로젝트를 잘 만들어나가고 싶다.
더 나아가 채식(비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채식을 하는 것이 유난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또 누구나 자신의 상황에 맞게 채식을 선택할 수 있으면. 혹시 "일주일에 한 번 비건을 하는데, 나를 비건인으로 소개해도 될까?"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결국 우리는 함께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동료니까. 서로를 비난하기보다 북돋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