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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의미 Mar 06. 2022

우리만 아는 그곳으로



얼렌의 고속버스터미널은 이제 막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로 북적였다. 베이징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매고 있던 가방을 매표소 뒤 창고에 맡기고는 바쁘게 어딘가로 향하거나 버스 시간을 확인하거나 이른 아침을 꺼내 먹었다. 새벽잠이 덜 깨 그들을 멀뚱 거리며 쳐다보고 있던 차에 배에서 꾸룩, 꼬로로록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확실하게 나는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출발한 뒤로 한 번도 앉아서 제대로 된 밥 한 끼 챙겨 먹지 못한 것 같았다. 자판기라도 있을까 둘러본 역사 안엔 사람과 짐, 의자가 아닌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야. 국경 넘는 버스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지. 야티가 집채 만 한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여정에서 언제나처럼 충고를 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차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의 연 보라 숏컷이 사방으로 뻗쳐있었다. 야간 버스 안 좁아터진 간이침대에서도 평소처럼 요란하게 굴러다닌 듯했다.


복작거리는 차이니즈 사이에서 영어는 쫌 하지만 중국어라곤 니하오(안녕), 워 으어 (나 배고파) 밖에 모르는 나와, 언어보단 몸으로 표현하는 게 편한 야티가 서로를 쳐다봤다. 티켓은 끊어야지. 뭐라도 말해봐.


매표소 직원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무슨 말을 덧붙였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영어라 이해 못 하신 거 아니야? 음,, 그게 아니라요, 투! 투! 양거(두 개) 몽골리아! 티켓 플리즈. 내가 말하는 동안 옆에서 야티는 손가락 두 개를 열심히 흔들어 보이며 목적지를 향해 운전하듯 손을 휘저었다. 직원은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며 크게 손으로 엑스 모양을 그려 보였다.


복잡해진 머리로 대합실 의자에 잠시 몸을 기댔다. 집에서 지하철 다섯 정거장이면 갈 수 있는 김포공항을 버리고 대구까지 내려가 땡처리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던 사흘 전 밤이 생각났다. 여름인데도 서늘했던 베이징 공항에서 돗자리 깔고 쪼그려 잤던 이틀 전 새벽이, 에어컨이 고장 난 듯 가차 없이 차가운 바람이 뿜어졌던 야간 버스가 차례로 보였다. 바늘로 각막을 찌르는 건조한 바람이 따가워 눈꺼풀을 넓게 펴 비볐다. 멀리서 버스가 아니면 카풀도 없느냐고, 택시로는 가능하지 않냐고 이리저리 단어를 연거푸 나열해 물어보는 야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다들 안 된다고 말하는 눈치였다.


지금 몽골에서 나담 축제 기간이라 국경이 막혀버렸고 내일 오후나 되어야 열린다네요라고,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친절한 캐나다 청년이 말했다.


왔더. 쒸엣.


일부러 나담을 보러 이 시즌에 출발한 것부터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슬아슬했다. 나담 때문에 막혀버린 국경문 앞에 우리는 무기력했다. 항상 상황이 틀어지면 먼저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던 행동대장 야티도 말이 없어졌다.


한껏 찌푸린 미간으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나에게 사려 깊은 그는 자기 일행도 상황이 비슷하다며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축제를 놓치지 않을 방법이 있다고, 내일 저녁 이륙하는 경비행기를 타면 삼십 분 만에 바로 울란바토르로 갈 수 있다며 자신들이 예매한 비행기 번호며, 사이트며, 회원가입 절차를 알려줬다. 비싸다며 간단히 넘겨버린 해외 로밍이 절실했던 차였다. 빠르게 와이파이를 빌려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뭐래, 뭐래? 영어 앞에서만은 약해지는 야티 앞에 내가 유일하게 믿음직스러워질 때는 바로 이런 경우였다. 난 새로운 세계나 질서를 끌어와야지만 그 애보다 한발 혹은 반발 앞에서 그녀를 끌어볼 수 있었다. 아주 가끔 오는 그런 순간을 짜릿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은 나담이라 국경을 못 넘고 내일 저녁에 있는 경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대. 우리가 쓰려는 돈에서 4만 원 정도가 오버되긴 하는데 나쁘지 않아. 내일까지 여기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뜨겁게 내리쬐는 내몽골 자치구 햇빛 아래로 각자 머리의 하나 반은 더 있어 보이는 배낭을 멘 여자애 둘이 걷고 있었다. 바싹 마른 따뜻한 바람이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외벽이 다 벗겨진 채 드문드문 흩어져있는 건물들은 낮은 복층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창문은 자주 뻥 뚫리고 깨져 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어 보였다. 밖이 너무 밝아 상대적으로 굴처럼 깊숙해 보이는 일 층 안으로만 미세한 움직임들이 일곤 했다. 이곳엔 아주 머무르기로 작정한 사람이거나 곧 떠날 사람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길을 걸었지이, 누군가 옆에 있다고오, 느꼈을 때에, 난 이미 알아버렸네.


앞에서 걷던 야티가 선창 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노래를 가만히 듣다가 적당할 때 같이 부르는 게 대부분의 내 역할이었다.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국경도시에 사람 목소리가 추가되었다. 이질적인 무언가를 중얼거려 괜히 외롭고 처량하게 들렸다. 목에 걸어둔 우쿨렐레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연주랄 것도 없는 C 코드와 D 코드를 번갈아 쳤다. 반주가 나쁘지 않았는지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그나마 눈에 보이는 간판들은 전부 간체자로 쓰여 있었다. 그 글자마저도 흐려졌거나 흐려지는 중이었다. 산울림에 이어 이선희 노래 메들리를 부르던 야티가 잠시 멈추더니, 이럴 때는 무조건 빨간색 물건 배치가 많은 데를 골라 들어가야 한다, 여긴 국경이지만 중국이고 중국 사람들은 손님맞이를 위해 분명 샛 빨강 인테리어를 고집했을 거라고. 숙소라고 예측하고 들어간 곳은 인당 1만 원 숙박이 가능한 호텔 건물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걔는 외부자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직감 레이더를 최대치로 발휘하곤 했다. 언젠가 낯선 곳에 혼자 떨어졌을 때 그 감각을 빌려다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4평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방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예상치 못하게 생겨버린 여유 시간과 장소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사실 바로 국경을 넘으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방은 얼마나 깔끔하고 정돈되었는지, 화장실 물 세기라 얼마나 적당하게 잘 나오는지. 색깔 있는 전등이 있어 조금 있다가 사진 찍을 때 엄청난 도움이 되겠다는 것 등의 것들을 나열했다. 주인장의 추천으로 근처 두유와 만두가 맛있다는 식당에 들르기 위해 방 밖을 나왔을 땐 이미 둘 다 별 이유도 없이 한껏 흥분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리어카 위에 가득 쌓인 과일을 팔고 다니는 상인을 만났다. “골라 골라 천 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상인의 과일들은 정말이지 무지무지 싸고 맛있어 보였다. 조금만 사자고 서로에게 당부하던 우리의 손엔 수박 반 통과 백도 복숭아 네 개, 사과 두 개, 자두 여섯 개, 체리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배불리 먹은 과일을 소화하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추다 보니 더워서 옷도 홀라당 벗어던졌다. 한 명은 바닥에서 한 명은 침대 위에서, 이제 막 야티의 최애 아이돌이 되어버린 방탄소년단 동작을 따라 췄다. 어느덧 헐떡거리던 숨을 고르다가, 침대에 얼굴을 기대고 엎드렸다. 야티도 덩달아 옆으로 쓰러졌다. 시원하게 말라가는 등짝과 허벅지가 느껴졌다. 보라색 조명 아래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었다.


의미야 나 발 좀 밟아줘. 많이 걷거나 숙취가 심한 다음 날 종종 그녀는 마사지 요청을 하곤 했다. 뭔가를 요청할 때면 그 애는 한없이 너그러워져서는 괜히 부끄럽게 만들었다. 발 볼과 뒤꿈치를 따라 발목, 종아리, 바깥 허벅지 엉덩이를 꾹꾹 눌렀다. 어, 오, 음음 어우 시원해. 아무것도 안 입은 둘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니 카마수트라 요가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침 네팔에서 사 온 헤나 물감이 있다며 가방을 뒤적거린 야티는 내 허벅지, 골반, 허리와 등 사이를 꼬부라진 원과 겹쳐진 곡선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딱지가 진 문양을 떼어내니 진한 갈색의 무늬가 남아있었다. 금방 지워질 거라던 말과는 다르게 헤나는 여행하는 내내 희미해졌지만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림 @ 하야티


몽골 고비사막 여행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비포장도로로 내질러 달린 날이었다. 우리가 탄 러시아 지프 “후르홍”은 울퉁불퉁한 길의 생김새에 따라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튕겨냈다. 우리 일행은 두 명에서 여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차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한국어와 몽골어, 크로아티아어가 뒤섞였다. 안전벨트 따윈 없는 지프 안에서 손잡이만 잡아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될 때쯤, 여섯일곱 개의 게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떤 곳에 도착했다. 풀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초원인 것 같았고 막힘없이 뚜렷하게 보이는 지평선이 생경해서 저녁 준비를 하다가도 자꾸 멍하니 보고만 있게 되었다.


양고기가 다 익을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읽어보고 싶었다며 포켓북을 챙겨 온 야티가 책을 들고 와 자리를 잡았다. 소리 내서 책을 읽어본 게 언제였을까 더듬거리며 한 줄 한 줄 번갈아 읽었다. 한참을 읽어나가다가 야티가 말했다.


나, 어린 왕자 처음 읽을 때는 이 장미가 캐릭터가 엄청나게 거슬렸거든? 까탈스럽고 지랄 맞기 짝이 없다 싶어서 이런 애랑 연애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들겠다 하고 말이야. 근데 요즘은 이 부분이 제일 좋아. 뭔가 애틋하고 야해.


장미 같은 애랑 연애하는 걸 상상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나간 연애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것보단 당장 옆에서 책을 읽는 야티 얼굴을 흘낏 쳐다보게 되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들고 다녔던 온 우쿨렐레에 다들 관심이 쏠려 야티와 내가 몇 곡의 듀엣을 부르고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노래를 가르쳐 주려던 참이었다. 광활한 사막 위로 어둠은 빠르게 찾아왔다. 확산하는 새까만 밤하늘에 다들 조용해졌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고요한 변화였다. 애매하게 켜놨던 헤드라이트를 껐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하늘만 보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너무 작아 보여서 내가 나 같지 않다고.


모였던 사람들은 홀린 듯이 다시 흩어졌다. 돗자리를 가져온 야티는 한사코 돗자리 따위 필요하지 않다고 챙기길 거부했던 나를 타박했다. 그럴 줄 알고 좀 큰 걸 가져왔다는 그녀 옆에 별말 없이 등을 대고 누웠다. 드문드문 푹신한 풀과 빼죽한 자갈들과 양 혹은 염소의 굳은 똥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사방이 고요해서 나와 걔의 숨소리만 들리게 되었을 때 유성이 떨어지는 게 보일 만큼, 은하가 모여 시냇물처럼 이어진다는 밀키웨이가 어디에 있는지 가리킬 수 있을 만큼 하늘은 선명해져 있었다.


지구별의 태초 모습을 보려면 몽골을 가보라는 시구를 읽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정해진 것 없이 마냥 펼쳐져 있을 것 같던 몽골은 언젠가는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꼭 그녀와 같이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고비의 바람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눈을 감으면 방 안에 들어와 있는 듯 아늑하고 포근했다. 이 상태로 마냥 누워있으면 잘 것 같았다. 들숨, 날숨. 또다시 들숨, 날숨을 반복하다가 언젠가 야티가 얘기해 주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기숙사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친구들과 몰래 한밤중에 나가 학교 운동장에서 홀딱 벗고 뛰어다니다가 드러누워버렸다는, 그래서 꽉 끼는 삼각팬티 속 감추기 바빴던 털에 처음으로 해방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정말 갑자기 말이다.


옷 벗자. 여기선 옷을 입고 있는 게 실례였다. 사람 빼고는 다 벗고 있었다. 알몸이기 딱 좋은 바람이 불었다. 원피스를 입고 있던 우리는 잽싸게 알몸이 되었다.


춤일지, 잦은 움직임일지, 단순 체조 일지, 요가의 브리지 자세일지, 물구나무서기 일지 모르는 무작위의 동작들로 우리는 서로를 연결했다. 걔가 먼저 움직이면, 내가 약간의 변주로 호응했다. 손등을 하늘로 밀어내고, 고개를 젖힌 채 맨발로 뛰어가다가 달라진 땅의 부스러기를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로 비볐다. 천천히 뻗은 다리 사이를, 겨드랑이를 언제 어디서부터 불게 되었는지 모르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은근하고 불규칙적으로 불어오는 미풍은 잦게 몸 사이사이 접혀 있던 털 사이를 파고들었다. 작게 틀어놓았던 음악 스트리밍에선 릴리 알랜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난 아무도 없는 곳을 가로질러 걸었어요

난 그 오솔길을 알고 있었죠

내 손등처럼

내 발밑에 지면을 느끼면서

강가에 앉았어요

아, 단순한 것

당신은 어디로 갔나요

여기가 그곳인가요 내가 꿈을 꾸던

이것이 모든 것에 끝일 수 있어요

그러니 같이 갈래요?

우리 둘만 아는 곳으로


지평선 위로 달이 솟았다. 뜨고 있는 달을 보면서 바닥에 털썩 누웠다. 그 애의 날개뼈가 내 어깨 위로 포개졌다. 평소대로라면 땀으로 끈적였을 어깨인데. 바람에 건조되어 보드라웠다.

한층 깊어진 호흡으로 그녀가 말했다. 

역시 넌 두 번째로 여행하기 좋은 메이트야. 

누가 첫 번째인데?

우리 언니.

순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이대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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