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현 Mar 12. 2021

그래도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을 위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는 누구도 탓하지 않는 절제 속 영화를 본 관객으로 하여금 성찰의 시작점을 제시해준다.


영화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빈 컵과 같다. 그 컵에 감정이라는 물을 채우는 것은 관객이므로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감정으로 컵을 다 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무비위크 170호 인터뷰 中




사랑하는 것의 반대말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



 <아무도 모른다>에는 아빠가 다른 네 남매와 그들의 엄마가 등장한다. 네 남매의 장남 아키라는 경제적 가장인 엄마보다도 가정을 유지시키는 데에 있어 큰 역할을 지닌 실질적 가장이라 할 수 있다. 집 안의 모든 일을 도맡으면서도 엄마의 저녁식사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제한된 생활과 규칙 속에서 그래도 '엄마'라는 존재와 함께였기에 웃을 수 있었던 아이들의 표정 속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 했음이 보인다.



분홍색 캐리어

분홍색 캐리어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연결시키며 스토리를 극대화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대조시켜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아무도 모른다 - 아무도 모른다


 영화는 분홍색 캐리어를 들고 모노레일을 타고 있는 아키라와 사키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무도 모른다.'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는가를 영화를 다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를 알기 전까지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현재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모노레일 장면으로 돌아와 아키라와 사키가 분홍색 캐리어를 공항 옆에 묻어두고 돌아오는 장면으로, 그리고 남은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캐리어를 공항 옆에 묻어 뒀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지는 결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행복 - 슬픔


 영화 초반, 아키라 가족이 이사를 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분홍색 캐리어는 '행복'이다. 아빠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네 남매와 그들을 사랑해주는 엄마라는 존재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삶은 행복했다. 엄마가 늦게 들어와도, 집에서 소리를 지를 수 없어도, 베란다에 조차 나갈 수 없어도, 학교에 다니지 못해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처음 집으로 이사 올 때 시게루가 숨어있던 분홍색 캐리어에는 이제 유키가 들어가 있다. "키가 컸구나 유키." 여기서부터의 분홍색 캐리어는 '슬픔'이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이 상황에 화가 나며,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객인 나에 대한 무력감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긴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라는 존재가 부재한 한 가족의 삶은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흔들린다. 그들의 엄마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 그렇게 한 가족이 해체되었다. 사랑하는 것의 반대말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었다.



베란다

베란다는 규칙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규칙을 깨는 공간으로 바뀌며 영화의 흐름을 바꾼다.


나갈 수 없는 금기의 공간


 이 가족의 규칙 중 하나는 베란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규칙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떠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돌아오겠다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아이들은 그 금기를 하나씩 깨기 시작한다. 유키는 맞지도 않는 뽁뽁이 신발을 신고 외출을 하고, 시게루는 장난감을 베란다로 날려 베란다에 나가서 놀기 시작한다. 아키라는 가장이라는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친구들을 사귀어 놀기 시작한다. 마치 금기를 깨기라도 하면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버려진 씨앗들로 무성해진 생명의 공간


 '현관에 꺼내 놓은 신발 한 줄.' 이동진과 김중혁의 영화당 #214에서 김중혁은 최고의 한 줄로 대사가 아닌 아이들의 신발 한 줄을 꼽았다. 벚꽃이 만발한 때에 이들은 함께 외출을 한다. 마치 엄마가 돌아오신 것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엄마가 돌아오면 결코 할 수 없는 함께하는 외출인 것이다.

 

    "형, 씨야"

    "누가 버리고 간 거 아니야?"

    "불쌍하다"

    "여기도"

    "둘, 셋, 넷, 다섯"    

    "이거 진짜 많다"


 아이들은 버려진 씨앗을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에 키운다. 다 먹은 컵라면 용기에 흙을 담고 씨앗을 심어 물을 주며 버려진 생명이 버려진 생명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이 생명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 걱정과 달리 베란다는 어느새 초록 생명들로 무성해진다. 아이들의 상황은 계속해서 열악해지는데 베란다의 식물들은 무성히도 자란다. 아이들은 힘들게 공원에서 받아온 물을 식물에게 준다. 식물이 이렇게 무성히 자란 데에는 아이들이 물을 준 덕분이겠지만 그 속엔 생명에 대한 아이들의 꾸준히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버림받은 아이들이 생명을 여기는 모습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 아이들도 베란다의 식물처럼 무성히 자라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말이다.



무수히 오르내리던 계단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눈이 올 때나 비가 올 때나 항상 지나가게 되는 장소. 집에서 나가 어딘가로 향해야 할 때 꼭 거쳐야 하는 곳이 이 아이들에게는 계단이라는 장소이다. 아키라 혼자 장을 봐서 들어올 때도, 아이들 모두가 손을 잡고 놀러 나갈 때에도, 공원에 물을 뜨러 갈 때에도 계단을 따라 올라가고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올라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들의 사회, 내려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들의 삶이다. 왜 감독은 이 둘의 공간을 이렇게 분리해뒀을까.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속도, 아이들 사이의 거리와 표정으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들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마저도 한참을 내려가야 있는 그들의 삶의 공간처럼 아이들만의 힘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이 사회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영화에는 관객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며,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아무도 탓하지 않으며 영화 속 그 누구도 울지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가 지향해야 하는 윤리성과 동시에 영화가 담아야 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찍으며 유지하고자 했던 시선을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감독이 말한 '거리'를 존재할 때 아름다운 '간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삶을 살아가면서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모두와 가깝고,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썩 괜찮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것에서든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나는 '간격'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간격은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답다.


 이 영화는 그 간격 속에서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으며 그 모두를 탓하고 있다.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라는 존재 또한 어쩌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코 탓하지 않음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 속 아이들은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울지 않는 아이들을 통해 영화는 관객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가 유지하고 있는 간격은 관객으로 하여금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라는 시선을 부여하며 결국 우리 모두를 탓함이다.



"그래도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을 위하여."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고 끝나는 이 영화의 마무리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성찰의 시작이 된다. 나 역시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성찰의 시작을 맞이했던 것 같다. 아직 나는 영화가 지향해야 하는 윤리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방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살아가는 오늘의 아이들을 위하여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야겠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밤하늘에 별이 뜨면 별을 보여주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려주며, 아침이 되면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게 해 주고, 노을이 지면 노을을 보여주는 나의 아빠와 엄마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아빠와 엄마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