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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현 May 05. 2021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예술가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원앤제이 <평행///연결>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 중에 '밸런스 게임'이라고 있다. 상반된 A와 B 중에서 무엇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 정하는 게임이다. '짜장면 vs 짬뽕'부터 시작해서 '한 달 동안 집 안에서 서서 자기 vs 공원 벤치에서 누워서 자기', '평생 물만 마시기 vs 다른 음료 다 마실 수 있는데 소변 한 방울씩 섞여있기' 등 둘 중 어느 하나 선택하고 싶지 않은 질문들도 즐비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 하나를 해보겠다. 'Dreamer(몽상가) vs Realist(현실주의자)'




Error Value, 오류 값



북촌에 위치한 갤러리 One And J. (원앤제이)에서 진행하고 있는 <평행///연결>에 다녀왔다. 이 전시는 그룹전으로 박선민과 이의록이 참여했으며, 전혀 교차점을 가지지 않는 두 사람의 작품을 통해 평행함과 그것들의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두 작가의 작품들은 양극을 향해 멀어져 가는 듯 보이며, 전시는 이를 평행시킬 뿐이다. 원앤제이 갤러리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우주(블랙홀)와 미생물(버섯)이라는 아주 큰 것과 아주 작은 것에 각각 관심을 갖고, 전혀 다른 태도와 관심으로 작업하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 평행하게 구성한 영상과 사진, 설치 10 작품을 통해 교차지점이 없어 보이는 작품의 이미지들이 겹쳐 보이게 하며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것들과 현실이 맞닿아지는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이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이의 거리인 '차이'를 사유하는 동시에,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 평행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연결해보기를 요청한다.




이분법적 세계관 속 평행과 연결


1. 전시는 이인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섞이지 않는 두 사람의 작품을 드러내며 평행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인전이다.


2. 전시는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작가의 작품들은 각 층에 나누어 전시된다.

1층과 2층이라는 공간의 차이 속 두 작가는 분리되어 있으며, 전시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두 층의 전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을 오가는 사건으로 구성된다.


3.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의록은 아주 큰 것(우주/블랙홀)에 관심을 가지며, 세계의 구조와 조건들을 인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고, 박선민은 아주 작은 것(미생물/버섯)에 관심을 가지며, 대상과 신체의 맞닿음으로 직접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작품을 만든다.


4. 관객의 경험은 양극의 이미지들을 다시 세계로 재구성하며, 양극을 오가는 계단 위에서 이 이미지들이 중첩되었다가 흩어지며 통합되지 않고 오히려 파편화되어 재배치되기를 유도한다.



극대

이의록, <Lagrange Point>, 2019. 단채널 영상, 30분, 가변크기.
이의록, <Merry Go Round>, 2020. 단채널 영상, 42분, 가변크기.
이의록, <Merry Go Round>, 2020. 단채널 영상, 42분, 가변크기.


극소

박선민, <버섯의 건축>, 2019.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5분 18초, 가변크기.
박선민,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다>, 2018. 단채널 영상, 컬러, 7분 45초, 가변크기.
박선민, <소금 결정>, 2013. 피그먼트 프린트, 디아섹, 40 x 50 cm.
박선민, <싸리> , 2021. 피그먼트 프린트, 디아섹, 120 x 98 cm


연결


이미지와 언어

(좌) 이의록, <Lagrange Point> (우) 박선민, <버섯의 건축>

영상에 등장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이의록의 <Lagrange Point>에서는 언어가 들려지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나뉜다. 발화자의 이미지가 소리와 함께 등장할 때(가까이에 있을 때) 낯설지 않았던 언어는, 흑백 무성(無聲)의 장면에서 텍스트로만 등장할 때(이미지와 언어가 멀어졌을 때) 오히려 더 강하게 이미지에 다가간다. 박선민의 <버섯의 건축>에서는 이미지를 지시하지 않는 언어를 등장시키며, 보여지는 이미지들과 결과 맥이 다른 정보와 지식의 언어이지만 분리되었기에 교차할 수 있는 어느 지점에서 서로에게 달라붙어 은유한다. 이의록과 박선민의 극대와 극소는 이런 식으로 평행하며 또한 연결된다.




Dreamer(몽상가) vs Realist(현실주의자)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양극(兩極)이 존재한다. 양극(兩極)이란 사전적으로 화학에서의 양극과 음극, 지구에서의 북극과 남극을 일컬으며, 서로 매우 심하게 거리가 있거나 상반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다림과 좇음, 영원과 순간, 극소와 극대. 이러한 양극에는 그 사이의 거리, 즉 '차이'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 틈 속에서 쉴 새 없이 갈등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극적인 것들이 가장 조화로울 수 있다고. 즉, 상반되는 양 극단은 독립적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배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몽상가들(The Dreamers)>을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보았다. 평들은 하나같이 영화 속 인물들의 '몽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듯하였다. 현실과 양극에 존재하는 '몽상', '꿈'이라는 형체 없는 공간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꿈, 청춘, 이상 등의 단어를 말하며 현실, 혁명, 이성과는 함께 쓰일 수 없다는 듯 대비시킨다. 하지만 끝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지극히 몽상가였던 이사밸과 태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극히 몽상가이기에 지극히 이성적일 수 있다고. 이 양극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함께여야 존재할 수 있음이라고.


양극은 존재하지만 모든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 속에서는 예술가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어질 수 없는 대립되는 무언가들이 평행하며, 또 그것들이 중첩되는 어느 부분에서는 연결될 수 있음이 자연스러운 것,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시작이며 표현과 해석의 자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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