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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대 Jan 05. 2022

이중언어 대안학교를 꿈꾼다

미래교육을 바꾸는 사람들(4)_사할린동포 3세 언어교육자 정영순

<미래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인천광역시 미래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활동을 하는지, 미래교육에 대해 어떤 꿈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들어보았습니다.


정영순 위원은 사할린 동포 3세이다. 러시아 이름은 텐 잔나 블로드미로브나(Тен Жанна Владимировна)사할린으로 강제이주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은 경북이었다고 한다. 정영순 위원은 2020년 여름, 몇 년에 걸친 한국어 시험과 여러 준비 끝에 귀화하였다.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사할린동포의 동반가족으로서 한국 국적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자녀들은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미성년 자녀들도 함께 국적을 얻기 위해 일반 귀화의 길을 선택했다. 

러시아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영순 위원

텐 잔나는 이르쿠츠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가 이르쿠츠크 공과대학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자란 텐 잔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90년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사범대학 동양학부 한영과(한국어, 영어교사 양성)에 입학하였는데, 대학 입학 전까지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대부분의 사할린동포 가정이 그랬던 것처럼 텐 잔나 가정에서도 러시아어만 썼기 때문이다. 동양학부에서 한국어 전공을 선택한 것은 사할린 동포로서의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좋은 성적의 졸업생만 지원 가능한 인기 학과였기 때문이다. 반에서 사할린 동포는 자신뿐이고 생김새부터 달랐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뭐든 열심히 했다. 덕분에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인기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텐 잔나가 처음 사할린 동포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졸업을 앞둔 1989년, 발레단원으로 평양 유스 페스티벌(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했어요. 생김새는 같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동포들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죠. 귀국 뒤 조금씩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해 알아보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때 행사 참여 때문에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정영순 위원은 대학 졸업 뒤 모스크바 국립종합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박사과정을 시작해 2000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때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어 강사로 활동했다. 


정영순 위원이 한국에 온 것은 2007년이었다. 그때 아들은 6세, 딸은 3세였다. 공부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들은 국제학교에 보냈고,  딸은 한국 유치원에 보냈는데 금요일마다 한자 받아쓰기를 하는 등 시키는 게 많아 엄마와 딸 모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딸도 초등학교 입학할 때 국제학교를 선택했다. 좋은 성적, 좋은 대학보다 행복하게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러시안 칼리지 부산> 설립자 정영순 인터뷰 기사(<새고려신문> 2019.12.6.)

이같은 개인 경험이 한국으로 이주한 러시아인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텐 잔나는 2016년 모스크바국립종합대학교 러시아어·러시아문학대학에서 외국인을 위한 러시아어교수법을 복수 전공한 다음, 2017년 <러시안 칼리지 부산>을 설립하였다. 


"러시아와 한국의 교육 체계는 많이 달라요. 준비 없이 한국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말이 안 되니까 부모들이 주로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녀교육에 관한 정보를 얻어요. 그 사람들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니 제대로 된 정보라고 할 수 없죠. 학교에 보내면 다 해주는 러시아와 달리 사교육을 해야 따라갈 수 있다는 걸 몰라요. 


초등학교 때는 그런대로 다니다가 중학교에 가면 사춘기 문제에, 외국인 왕따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고, 심지어 자해하는 아이까지 생기고. 이게 다 한국어를 못 하니까 다른 과목도 쫓아갈 수 없어서 성적이 나쁘고 왕따도 당하니 아웃사이더, 루저가 되어가는 거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중언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아이들은 자라니까 당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위해 <러시안 칼리지 부산>을 세웠어요. 한국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학교 공부와 대학 진학 준비를 돕기 위해서요."


장기적으로는 이중언어 대안학교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에서 미등록 단체로 <러시안 칼리지 부산>을 시작했는데, 6개월만에 사립 학원으로 등록했다. 학원으로 등록해야만 러시아에서 교사를 초빙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러시아 각지에서 8명의 실력 있는 교사들을 초빙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2017년 첫해 20명으로 시작한 <러시안 칼리지 부산>은 현재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 70명이 다니고 있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한국 학교를 다니고, 오후에 <러시안 칼리지 부산>에서 러시아어 수업을 받는다. <러시안 칼리지 부산>은 블라디보스톡 소재 학교의 분교로 운영되고 있어서 매년 시험만 통과하면 학력 인정을 받고 러시아 대학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이 같은 운영 방법을 통해 학생들은 한국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고 러시아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다. 중학교 2,3학년이 되면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데, 한국 대학 진학이 어려워 러시아 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규 수업 이외에 한국 학교를 다니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주말학교도 운영하는데 약 50명이 나오고 있다.


정영순 위원은 2020년부터 1학기부터 경상대 인문대학에서, 2021년 2학기부터 경찰대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대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면서 이중언어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껴요. 4년 동안 러시아어를 전공해도 러시아 문화를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저도 대학부터 지금까지 30년 남짓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모국어만큼 하지 못하거든요. 그러니 러시아어와 문화에 익숙한 고려인들이 이중언어 교육을 받는다면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민간 외교관이자 인재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한국 외교와 경제에서 독립국가연합(CIS)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잖아요."



이중언어교육(bilingual education)은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재로 교육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어 의사소통 능격 향상과 공교육 진입에 중점을 두는 한국어 교육과 달리 글로벌 인재 양성에 목적을 둔다. 또한 이중언어교육은 언어를 잘 구사하는 차원을 넘어 문화 소통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이며 상호문화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문화학생의 교육소외를 해결하고자 교육부는 2006년부터 다문화학생 관련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이중언어교육 정책이 등장한 것은 2009년부터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중언어교육의 기본을 체계화하기 위한 노력이나 이중언어 강사 확대가 이루어지 않고 있으며, 기존 시행 프로그램을 되풀이하는 상태이다.

전체 인구의 23.5%(2017년)가 이민 배경을 가진 독일도 1996년 "학교에서의 상호문화이해 교양과 교육" 권고안을 발표하면서 이주학생의 이중언어·다중언어 능력을 사회 자원으로 이해하고 후원하는 교육을 시행하였다. 실험학교인 국립유럽학교에서는 각각 독일어와 파트너언어로 진행하는 교과과정, 두 언어를 동일한 비중으로 진행하는 교과과정이 따로 있다. - 함윤주(2020). 다문화교육정책 개선방안 연구 / 신용식(2019). 상호문화적 의사소통능력 향상을 위한 이중언어교육. 참조



정영순 위원은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년 뒤에는 인천으로 이사하려고 한다. 이중언어 대안학교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이다. 부산은 이주노동 러시아인이나 결혼이주 러시아인이 중심인 데 비해 수도권, 특히 인천에 고려인들이 밀접해 있기 때문에 이중언어 대안학교가 절실히 필요하다. 준비가 되는대로 고려인 최대 밀집지역인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에서 주말학교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이중언어 교사 한 분이 1년 동안 고생해서 중학교 수학을 러시아어로 번역했어요. 이를 이용해서 가르쳤더니 확실히 교육 효과가 확실히 좋았어요. 작은 실험이지만 그 결과를 보면서 이중언어 교육의 필요성과 효과를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어요. 

현재 고려인 학부모 몇 분, 저, 고려인 지원단체 활동가로 준비팀을 구성하고 서울 여명학교, 인천 한누리학교 등을 방문하고, 학부모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하기도 했어요. 대안학교에는 부적응 학생을 위한 대안학교와 인재 양성을 위한 대안학교가 있는데, 그 둘 중에서 인재 양성 대안학교로 만들기로 했어요. 이중언어교육의 성과를 좀 더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은 주말학교로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먼저 초등학교를 설립한 다음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에 따라 중학교, 고등학교도 설립하려고 해요. 길게는 먼곳에 사는 학생을 위한 기숙학교도 생각하고 있어요. 

학력인정 대안학교로 설립할 생각으로 관련 법도 검토하고 있어요. 여명학교 교장 선생님이 반드시 학력 인정 대안학교로 시작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안 그러면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학원이 될 수도 있다면서요."


이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상호문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이중언어교육이 필요하다. 


정영순 위원이 인천광역시 미래교육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에서 함께 활동하는 손정진 위원의 권유 때문이다. 당사자가 교육거버넌스에 적극 참여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문화 차이도 있고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아서 잘 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지만, 우물 안에 머물러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시민의 힘으로 엄청난 사회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어요. 솔직히 고려인들은 시민의식, 권리의식이 부족해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미래를 생각하면 고려인들도 시민의식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음은 있어도 여건이 안 되어서 활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여건이 되는 저부터 나서야겠다는 생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시민의 힘으로 우리가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합니다."


고려인이 아닌 정영순 위원이 대한고려인협회 교육문화스포츠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것도 이중언어 대안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비전 때문이다. 지금은 선학중학교 교육문화복합시설 <마을엔>의 도움으로 함박마을 고려인 학부모를 대상으로 교육제도 설명회, 대학입시 설명회를 준비하고 있다. 정영순 위원과 손정진 위원의 바램대로 인천에 최초로 이중언어 대안학교가 설립되어 다문화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날을 볼 수 있기를 함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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