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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Jul 20. 2022

홍상수의 <소설가의 영화>를 보고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영화를 보고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나는 울었어. 불가능한 것만 같은 순수에서. 흰 꽃을 담은 부케에 나뭇잎 두 개가 어울릴지, 세 개가 어울릴지 고르는 길수의 표정이 사무쳤어. 그 들꽃을 꺾어 가져다주는 중년 여성은 너무나 선명했어. 나는 이거 맘에 안 들었는데, 따른 거는 없어? 근데 이것도 이쁘다. 이쁘지?


뭔갈 주어다 이쁘다 얘기해본 적 없는 나는 죽고 싶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손바닥 가운데를 만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영화 내내 길수를 따라다니던 말, 길수씨는 진짜 순수해요. 홍상수의 세계에서 '순수'는 오해였다가 진실이 되어간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부터


내게 옛 적 홍상수의 영화는 전부 보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불편했다. '북촌 방향' 엔딩에서 마주했던 황망한 유준상의 눈빛,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마주했던 정은채의 고독, '우리 선희' 엔딩에서 마주했던 선희에 대한 남자들의 벙찐 대화. 그 영화들의 화자들은 갈 곳을 잃어 보였고 그렇기에 더욱 선을 재고 간극을 재며 밑 낯을 드러냈다. 화자들의 '너는 최고야.', '너는 천사 같아'라는 대상 없는 대상화가 난무한 영화에서 나는 좌절했다. 너무 현실 같아서. 가진 게 없어 매력을 흉내 내지 못하는 나의 결핍 또한 비추는 것 같았다. 섹슈얼리티는 갈수록 어렵고 나는 원하는 애정을 쟁취할 방법을 모르는데. 모두가 홀로 뿔뿔이 흩어지는구나.


그러다 간만에 보게 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홍상수가 어떤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내 스스로 확신할 정도로 인상 깊었다. 그 영화에서 핑크색 그림을 그리던 김민희는 막이 전환되며 다시 녹색 그림을 그린다. 핑크색 그림을 그리는 김민희에게 결혼반지를 숨기던 정재영은 녹색 그림을 그리는 김민희에게 결혼반지를 줘 버린다. 정재영은 술자리에서 뻔한 말로 간극을 재는 대신, 바지를 벗는다. 녹색의 김민희는 핑크의 김민희와 달리 루틴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때 파편화된 비일상의 집합이었던 홍상수의 화자가 비로소 일상을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상의 탄생, 일상은 이어진다. 그 속에서 나는 갈 곳이 있으며 정처 없이 배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상에서는 관계에 대한 다른 정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나쁜 마음이 없어질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을 휘발시키지 않는다. 그 대상을 빌어 내 자신이 벌거벗겨지기 마련이다.


일상은 나를 진정 사랑하는 데서 만들어진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나를 휘발시키지 않고 벗은 몸을 골똘히 보게 될 것이다. 내 벗은 몸을 둘러싼 세계에서 맞는 옷을 찾아갈 것이다. 루틴. 그렇게 반지도 받아보고 남의 바지도 벗겨보고, 그러다 보면 기적처럼 나도 남 덕에 다시 한번 훌훌 벗어봐야지 결심할 때도 있겠고. 그 사이 나는 진정 아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찾을 수 있으리라.






'지금은맞고'의 연장이라면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다면. 다시 현재로 돌아와 '소설가의 영화'를 보는 나는 내내 울컥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이전에 탄생시킨 일상에서 재조직되는 사랑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순수를 목격했다고 감히 말한다. 또한 홍상수는 온 러닝타임을 다해 그를 목격하는 방법은 굉장히 쉽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방법은 이렇다.

1. 선언한다. 2. 발견한다. 3. 살아간다.



선언한다


일상을 재정의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언은 일상을 재정의한다. 이 영화는 시끄러운 싸움을 뚫고 이혜영이 '날이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라는 수어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언의 힘은 전혀 그렇지 않은 현실에 가능성을 만든다. 자, 우리 이 일상을 좋다고 하기로 하자. 예수를 믿겠다 선언하면 천국에 가는 세상에서, 날이 좋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떤 곳에 도달하게 될까. 아마도 일상 속 만남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지 모른다.


이혜영은 하남의 타워에서 지난한 사이의 옛 동료들과 함께 망원경으로 저 너머를 관찰한다. 그 너머의 풍경에서 김민희는 관찰되는 것이 아닌 발견된다. 김민희는 빠르게 걷고 있다. 마치 실컷 다니자는 선언을 이행하는 사람처럼.



선언한다 : 너는 대상이 아닌 너


이후 소설가 이혜영은 망원경 너머가 아닌, 산책로에서 김민희를 마주하게 된다. 땀냄새를 신경 쓰는 김민희에게 이혜영은 그녀를 찍고 싶다고 한다. 그리곤 자신이 꿈꾸는 이야기에 대해 얘기한다. 자신이 꿈꾸는 이야기는 오로지 자연스러운 상태의 배우가 그저 사는 일이란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소설가 이혜영은 어떤 아우라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늙은 선배의 주장에 반해 그 자연스러운 모습도 이야기라는 것을 반복 강조한다.


너와 너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알고 싶다는 것. 땀냄새가 난다는 너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착각하지도 않겠지만, 그 일상은 나에게 또 들여다볼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것. 혹은, 그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


* 소설가의 영화는 여러 차례 대상화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대상화란 타인을 자의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을 식별하기 위해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지만, 그 결은 인식하는 자의 결핍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자에서 천사를 볼 수도, 귀신을 볼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생물학적 여자가 존재론적으로 무엇인지 답을 내릴 수 있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내린다. 그렇다면 무엇에 따라서?


* 대상과 존재는 늘 거리가 있기 마련이니 어찌 되었든 답은 마련된다. 그 답이 오답인지 정답인지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답과 대상의 간극을 좁혀볼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들은 늘 일어난다. 땀 흘리는 김민희와 이혜영의 대화처럼, 떡볶이 집에서의 김민희와 아이의 대화처럼. (떡볶이집에서 어떤 아이가 김민희와 이혜영을 응시한다. 나는 그 아이와 망원경 너머로 김민희를 보던 이혜영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김민희는 시선을 넘어 그 아이에게 말을 건다. 나는 김민희의 말걺 전후로 그 아이의 시선이 무엇이 향했을지 궁금하다.)



발견한다


그래서 그렇게 소설가가 갈구한 자연스러운 이야기라는 건 어떤 모습인데? 이혜영이 만든 영화처럼 비쳐 삽입된 단막극은 내게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발견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스레 순수하며 사랑이 가득하다. 중년 여성과 꽃다발을 만드는 이야기. 흑백으로 시작된 극은 컬러로 전환된다. '너무 이쁜데, 색깔로 찍었어?' 뒤이어 컬러로 전환되며 비치는 수수한 꽃다발. 이는 모든 내러티브를 이어가던 흑백 장면들을 컬러로 전환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영화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컬러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자연스럽고 가장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다시 자연스럽지 않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자연스러움이 분명하다. 내게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음은 자명하니까. 꽃다발은 아니었어도 생의 작은 조각을 보며 깔깔거리는 순간은 분명 있었다. 분명 나는 여럿을 색깔로 찍어 태그해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고, 가끔은 들춰보며 다시 또 이런 순간을 만들어야지 하고 결심했다. 다만, 내게 이것은 이야기가 아닌 '순간'이었을 뿐. 순간으로 비친 그 시간을 자연스럽지 않은 이벤트로 기억했을 뿐. 발견되지 않았을 뿐.


그 이벤트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 순수함이 어쩌면 진짜 자연스러운 맥락이 되었을 때, 길수(김민희)씨는 진짜 순수해요.라는 허공의 판단이 모조리 진담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을 몰랐을 뿐.



살아간다 


김민희에게 영화를 틀어준 후, 이후 밖에 있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소설가 이혜영은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운다. 영화가 끝난 후 나온 김민희는 밖에 아무도 있지 않은 것에 심히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곤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렇게 소설가의 영화는 끝난다. 꽃다발을 만드는 김민희와 그가 끝난 후 사람들을 찾아 엘리베이터를 타는 김민희의 모습. 그 모습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김민희는 땀 냄새가 나도록 산책을 하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내 자연스러운 모습을 이야기로 남기기도 한다. 그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찬란하게 빛나는 순수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남지 않은 막의 뒤켠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저 않을 틈은 없다. 잠깐의 실망감은 있겠지만, 다시 누군가를 찾아가기로 해.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나는 울었어. 불가능한 것만 같은 순수에서.

순수는 가능하지도,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가능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주의자의 다큐멘터리가 아닌 소설가의 영화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울었어.


나는 영화의 액자식 구성을 이루는 앞, 속, 뒤의 이야기 모두 소설가가 만들어내고자 한 자연스러운 이야기, 즉 홍상수가 만들어 내고 싶었던 자연스러운 서사라고 본다. 긍정적 선언-순수한 사랑-지속적 일상. 이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하지만 얼마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홍상수는 이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이것을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 소설가의 단절된 소설 이후, 마침내 찍은 영화라 한다.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러한 긍정의 연속이 과연 삶이 될 수 있을까. 삶은 좆같다로 시작하는 선언에서 술 먹고 엎드려 자면 성폭행당하는 현실에서,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섹스필름이 되어 팔리는 세상에서, 아무도 없으면 죽을 결심을 해 수천 명이 고독 사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라는 사실이 아니라 좋은 날이라는 선언이 필요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데서 사랑을 느끼는 잡티 없는 순수함이 필요해. 근데 또 그것이 영원할리는 없으니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 갈 사람들을 계속 계속 찾아가야 해. 너는 혼자가 아니야. 만약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아무도 없으면 산책을 해 봐. 누군가의 망원경 속에서 너는 발견될 수도 있어. 그 사람을 혹시나 만나게 되면, 그냥 솔직하게 땀냄새가 난다고 해. 어쩌면 그 사람은 너를 이야기라고 할 거야. 너는 영원히 아름답지는 않겠으나, 그 이야기 속에서는 신부야.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면. 맞는 것을 해야 한다면.



소설가의 신화


근데 또 모른다. 영화니까. 홍상수는 영화의 가능성을 얼마만치 믿고 있을까. 소설가의 소설이 아닌 영화. 소설이 매체에서 탈락한 이후의 세상에서 영화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즈음, 소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더 이상 우리 세상에서는 자극이 아닌 개인의 주체성을 내 개인의 모습이라 공감하며 인정할 일은 극히 없다. 윤리로 경직되어서 소외되었던 시절 이후 모든 윤리가 샅샅이 흩어진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다. 순수함이나 사랑이나 자유로움이나 그 무엇이든, 경중은 상품과 취향 사이에서 가늠될 뿐이다.


긍정적 선언-순수한 사랑-지속적 일상. 나는 이것이 교과서에 들어가면 좋겠어. 그냥 죽는 사람이 많이 없어질 거 같은데. 이것이 소설가의 작품이라서 문제일까. 소설가의 소설, 아니 영화여서 문제일까. 그렇다면 소설가의 영화가 아니라, 신화라면 어떨까.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선언처럼 날이 좋다고 선언하는 것이 전 지구적 일상이면 어떨까. 영화는 보지 않지. 소설은 써지지 않지. 하지만 신화는 불가능하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자꾸 명치를 치고 가라앉는다. 눈물이 난다. 그렇다면 동화는 어때?


뭔갈 주어다 이쁘다고 말하고 싶다.


첫 구절을 써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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