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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UP주부 Mar 29. 2023

너로 채운 나의 하루

열두 살의 무게


어젯밤.


계획표에 적은 대로 오늘치 학습을 끝까지 해내라고 닦달했다. 지난주에는 이틀밖에 지키지 못했으니, 이번 주는 지켜야 한다는 말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졸리다며 또 미루려는 아이를 붙들어놓고 문제를 정확히 풀 때까지 엄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입씨름하느라 힘은 다 뺐는데, 정작 아이가 한 건 수학 문제집 반 장. 잘 시간이 다 됐으니 억지로 더 하라고 할 수도 없어, 어제도 그렇게 그냥 지나갔다. 군기를 제대로 잡는 것도 아니고, 군기 잡는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니, 무엇을 위해 내 속이 까매져야 하나, 허탈하기도 하다.



오늘 아침.


“나는 성실하지도 않고 집중력도 없잖아.”


지난밤 오고 가는 입씨름 중에 아이가 했던 말이 내내 맴돌았다. 잔소리해도 호기롭게 튕겨내던 아이였기에, 자신의 일면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하기 싫은 건 마냥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다가 쉽게 약속을 저버리는, 무념무상의 철부지라고만 생각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서 부랴부랴 ‘전혀 그렇지 않은 이유’를 내놓았다. 피아노를 열심히 꾸준히 배우고 있는 거,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고. 결석 없이 학교 잘 다니고 내야 할 숙제도 꼬박꼬박 잘하는 것도 다 성실해서라고. 작정하고 할 일을 할 때 얼마나 집중해서 해내느냐고. 좋아하는 책 볼 때 게임할 때 집중력 짱이라고. 왜 성실하지 않고 집중력이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어떻게든 기를 살려주려 애를 쓰는데, 순순히 설득되지 않는 눈치여서 좀 더 설명을 보태야 했다.


“사람이 모든 면에서 100% 완벽하게 성실할 순 없어. 너가 볼 때 엄마는 맨날 성실해? 완벽하게 집중하는 것 같아?”

“어. 엄만 집안일도 성실히 하고 글 쓸 때 집중하잖아.”


아직 어미의 본모습을 모르는구나.. 일단 속으로 되게 안심했다. 아들은 엄마를 좋게 바라봐주는데, 정작 나는 반대로 대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들리는 대로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 미숙한 아이에게 나는 어떤 말들을 들려주었던가.


돌이켜보니, 근래 아이가 나에게서 듣는 말은 부정적인 피드백이 많았다. 또 미루는 거냐, 계획을 세워놓고 왜 안 지키는 거냐, 진득하게 앉아서 집중하지 못하냐, 빨리 안 먹냐, 시간 됐는데 왜 안 끄고 약속을 어기냐... 아이가 훌륭히 해내고 있는 것들은 속으로 인정하고, 미치지 못한 것만 그때그때 입 밖으로 내니 아이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수밖에. 내 자존을 챙기는 데는 열심이었는데, 정작 아이의 자존을 소홀히 관리했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오후.


학기초마다 치러야 하는 연중 행사. 학부모 상담이 있었다. 하필, 아이의 '학업'과 아이와의 '관계'라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는 시기다. 선생님과 어떤 얘길 나누면 좋을까, 대화가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야 할 텐데. 부담은 덜고 평정심을 취하려 애썼다. 다행히 지난주 총회 때 처음 만난 선생님의 인상은, 좋았다. 교육자로서의 자질과 역량 -이해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필요를 보며 그에 맞게 잘 지도하고자 하는 마인드- 이 돋보이는 분이셨다.


메모지를 꺼내, 나와 아이 사이 주된 화두 몇 가지를 써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졌다. 선생님께는 그저 보통의 학생 중 한 명일 뿐인데, 나에게는 단 하나의 특별함이라. 상담 중간에 나는 조금 울컥하기도 했고, 선생님은 차분히 공감해 주셨다. "이미 집 안에 훌륭한 교육자가 계시네요." 하셨는데, 그럴리가요. 현시점이 비루할수록 지향점이 화려해져서 '이상적인 부모역할'을 꿈꾸기만 한답니다. 현실은.....뭐.....



오늘 밤.


세 시간을 티비보고 밥먹고 놀다가 한 시간 반 동안 공부를 한 아이에게, 세 시간과 한 시간 반의 불균형에 대해 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또 나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찰나, 다행히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한 시간 반을 열심히 했으니 잘했다 잘했어~ 아이는 한 시간 반이 아니고 한 시간 사십분이라고 고쳐 말하고는, 금세 잠에 빠졌다. 하루를 살아내느라 너도 나도, 애썼다 애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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