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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스 Sep 12. 2023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관계

Your iCloud Storage is full.

출국 당일, 새벽 비행기라 전날 공항에서 밤을 새기로 결정한 나를 그는 공항까지 데려다줬다. 


"안녕, 너는 분명 가서도 잘할 거야."

"응, 고마워. 잘 지내고. 연락할게!"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나에게 너무 크고 소중한 사람이어서 놓고 싶지 않았다. 내가 놓으면 그냥 그대로 사르륵 녹아버릴 것 같아서.




'Your iCloud Storage is full.'

사진첩에 들어갈 때 첫 경고가 뜬 지 4주가 흘렀다. 그 경고문에 그냥 확인 버튼을 누르는 게 습관으로 굳어졌을 때쯔음, iCloud를 조금 정리해볼까 싶어 마음먹고 계정에 접속했다. 


'아, 이때 나 아가 같았네.'

스크롤을 쭈욱 내리다 발견한 이쁜 존재들.

옛 연인, 작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막내, 여기저기 전 세계를 쏘다니던 어린 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 옛 연인 사진, 눈물 버튼은 막내 솜이 사진이었다. 스크롤을 2할도 못 내리고 정리를 멈췄다. 아, 천천히 하자.


그와 나의 관계는 특별했다.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반된 배경에서 자랐고 자연스레 그 울타리 안에서 형성된 성격조차 정반대였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인 반면 그는 내면을 들여다보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이었다. 말보다 행동을 믿는 나와 말에 힘을 싣는 그. 그 와중에 삶의 방향, 가치관은 참 닮아있었다. 우리는 만나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출근길에 영상을 보다가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다, 싶은 건 꼭 잊지 않고 링크를 보냈다. 영화를 보고 그에게 얘기하고 싶은 주제가 생기면 기억해 뒀다가 만나면 다다다 쏟아내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해가 지는지도 모르게 살이 덧붙여지고 쭉쭉 커져만 갔다. 우리는 부끄러움, 좌절, 절망의 감정을 자주 나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감하고 자신의 흉터를 끄집어내곤 했다. 격한 감정의 혼돈을 함께 맞이했고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세우며 우리는 잘할 거야,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위로하곤 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누구보다 불행하다고 소리치고 싶은 이 마음을 해소해 준 사람이라서, 내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지 온몸으로 알아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어서 참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내 불행한 처지에 대한 위로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서로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런 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보다는 애증의 관계로 변해갔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더욱더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고 작은 상처가 쌓여갔다. 너무 작아서 있는지도 모르다가 한참 뒤 곪아서 터져 나왔다. 서로를 여전히 아끼지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다. 미래를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헤어졌다고 해서 어떻게 실을 가위로 잘라내듯 똑 자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별을 고하고도 한참을 만났다. 한참을 같이 지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냈고 심심하면 심심하니까 만나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산책도 했다. 가족이었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였다. 그에게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 강아지를 돌본다는 빌미로 우리는 이미 끝이 나버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관계를 정리 중이다.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잘 접어두고 있다. 몸에서 멀어지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안 났다. 출국하기 전 그에게 얘기한 대로 아주 가끔 안부를 물었고 예전처럼 대화를 했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잘 지내기를, 잘 살아내기를 바란다. 여전히 이따금씩 생각이 난다. 잘 지내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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