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트립을 떠나자마자 마주한 사고
갑자기 핸들 컨트롤 능력을 잃었을 때,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은 순간 정신을 붙잡고 브레이크를 밟고 반바퀴 회전해 차를 세웠다. 차는 이미 중앙선을 넘은 상태였다. 다행히 뒤따라오거나 마주 오는 차는 없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일단 차를 돌려 천천히 갓길에 세우고 놀란 마음을 부여잡았다. 어디 부딪힌 곳은 없으니 괜찮겠지 싶어서 다시 주행을 해봤다. 아, 휠 얼라인먼트가 완전히 돌아가버렸다.
하우스시팅이 끝나고 호주의 여름이 시작되기 전, 로드트립을 떠난다. 이번 로드트립은 노스 퀸즐랜드, 에얼리비치까지 다녀오는 것이 목표다. 별 준비 없이 가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오프라인 구글맵도 저장을 해 두었고, 곳곳의 괜찮은 캠핑장도 알아두었다. 하우스시팅으로 일주일 머물던 선샤인코스트에서 출발해 누사에서 친구를 만났다. 호주에 막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온 친구와 캠핑장에서 함께 하루를 보냈다. 곧 일본으로 돌아가는 서핑 메이트 메이와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서핑을 즐기고 헤어졌다. 그리고 차 점검을 받고 누사를 떠나 번다버그로 향하는 와중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사고가 난 거다.
아, 어떡하지. 큰일이다. 내려서 차를 살펴보는데 타이어는 멀쩡해 보였지만 뒷 타이어의 위치가 조금 이상했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차 외관만 열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건너편에서 나를 불렀다.
- 안녕, 도움 필요해?
- 응! 도와줘.
그와 함께 차를 살펴봤고 타이어는 멀쩡해서 타이어 교체는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잘 모르겠다며, 주행이 안 되니 견인을 불러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혹시 몰라 보험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봤지만 로드 어시스트 보험을 들지 않았던 나는 보험 처리를 할 수 없었다.
- 그럼 보험 추가 하시겠어요? 앞으로 또 그런 일이 발생할지 모르잖아요. 한 달에 8달러만 더 내면 돼요.
- 네, 그럴게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쳤다. 그다음 할 일은 가장 가까운 매커닉에 연락을 해 견인 트럭을 부르는 것. 견인비는 당연히 비쌌지만 어쩌겠나. 차를 끌고 직접 매캐닉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디 사는지부터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물어봤다. 그가 어느새 차에서 팩에 포장된 딸기를 꺼내 건넸다. 딸기를 나눠 먹으면서 끊임없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덕분에 물을 끓였는데 실수로 쏟아버린 실수처럼 잠시동안이나마 사소한 해프닝으로 여기게 해 줬다. 왜 도와줬냐고 물으니 그는 사고가 나기 전 들른 맥도날드에서 내 차를 봤다고 했다. 서핑보드를 차에 싣고 다니는 나를 보고 서퍼네? 위에 서핑할 곳이 없는데 어디로 가는 거지, 하고 궁금해하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러다 사고가 나 서있는 나를 보고 차를 돌려서 온 거다.
견인 트럭이 오고 그와 헤어졌다. 매커닉에 도착한 나는 차를 살펴보는 정비공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그는 내게 하루 이틀정도 걸릴 것 같다며 지낼 곳이 있냐고 물어봤다. 떠오른 사람은 하우스시팅 인연으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된, 엄마와도 같은 멜리사였다. 그녀는 흔쾌히 집을 내어주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샤워를 했다.
다음 날, 차가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산속에서 조금의 무력감을 느꼈다. 멜리사네 닭이 낳은 계란으로 계란프라이를 해 먹고 그녀와 함께 만든 김치로 두부김치도 해 먹었다. 더 이상 남은 식재료가 없어 마켓에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멜리사와 브렛이 로드트립을 떠났을 때 만난 친구들이 놀러 온다고 했다. 로스티드 포크를 해 먹을 거라고. 그들은 군용 차량을 개조해서 캠퍼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5년 동안 모든 걸 직접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그들의 차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갖춰진 작은 집이었다. 주방, 샤워공간, 침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천장.
돼지고기를 모닥불 한켠에 심어 두고 몇 시간을 구웠다. 우리는 고기가 구워지길 기다리며 와인 한 잔씩 들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그들의 로드트립에서 생긴 일, 그때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내 트립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차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얼마가 나올지 모를 수리비도 막막했고, 내가 운전을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피어올랐다.
- 사고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왜 그랬을까?
- 그냥 즐겨. 와인, 그리고 모닥불이 있잖아.
지금 이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이 별거 아니라 여기는 듯한 그들에게 고마웠다. 요란 떨어주지 않아서. 오히려 나를 겁먹게 하지 않아 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다치지 않았음에 감사한 하루라고 생각하면 되는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렇게 여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며칠 뒤 차가 수리됐다는 소식을 듣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브렛은 나에게 휴대용 버너를, 이안은 자신의 차에서는 지금 당장은 사용하지 않는 비상용 배터리라며 전기 충전할 때 쓰라고 휴대용 배터리를 빌려줬다. 어쩌다 보니 내 작은 로드트립이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과정의 일부이고 일상적이라는 듯 여기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여유'가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졌다. 대자연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그들에겐 유전적으로 내장된 ‘여유’ DNA가 있는 걸까. 자연 앞에서 마주하는 무력감을 겪어내는 과정에서 형성된 태도인 걸까. 수리된 차를 픽업하러 정비소에 데려다주는 브렛에게 물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겪은 경험들에 기반한 지혜라며,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냥 일어난 거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불안해하는 건 도움이 안 돼. 그냥 차분하게 기다리는 거지.
'운전 쉽게 생각하더니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어야지'가 아니라 '그냥 일어난 거야'. 우리는 해변가에 귀중품을 그냥 놓고 바다에 뛰어들지 않나. 누군가가 훔쳐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있는 법이니까. 매사에 득실을 따지며 사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한 일이 아닌가. 돈은 다시 벌면 되니 내가 다치지 않았음에, 온전한 몸과 마음이 있기에 감사한 하루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여유’ 앞에서 나도 ‘여유’ 있는 척을 해봤다. 천천히 익어가는 로스티드 포크 앞에서 배고프지 않은 척, 비싼 수리비에 마음 쓰라리지 않은 척. 그러다 보면 나도 그게 생기지 않을까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서핑 스팟이 없다. 차 안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무거운 애물단지라고 생각했던 서핑보드 덕에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사고로 멜리사네 집에 묵게 되었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책이나 후회 없이 그냥 일어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