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엄마로 태어난 자의 크고 작은 성장 모음집

by 여느


천지개벽급 충격. 산부인과 퇴원 후 조리원에서 첫날을 보내고 든 생각이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와 마주한 세상이 이런 기분일까?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인간 전지 캡슐에서 눈을 뜬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제까지의 삶은 문을 닫았다.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이를 겪었다니.


컨디션이 거의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도 보고, 집안일까지 하려니 이런 중노동이 따로 없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상대와 함께하다 보니 말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육아는 단순 반복 노동이라 뇌를 집중해서 쓰진 않아서 그런지, 자동차의 바퀴가 공회전하듯 머릿속이 팽팽 돈다. 아기가 잠든 틈에 재빨리 설거지를 하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느덧 부정적인 생각이 뭉게뭉게 퍼져간다. 우리의 2세가 생겼지만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사는 듯한 남편에 대한 원망이 커져간다. 반면 내 삶은 온데간데 없어진 것 같다. 이제 내 모든 욕구는 부정당한 채 평생 살아야 하나 싶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호르몬 탓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어두운 생각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간 나도, 아이에게도, 우리 가정 모두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다. 환경을 바꿔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거나 오디오북을 재생하거나 라디오를 켜둔다.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자칫 방심하면 또 서글퍼지곤 한다. 생각의 방향키를 돌려본다. 아이 월령에 맞춰 이 시기에 사주면 좋을 장난감과 책은 뭐가 있을지 고민한다. 주말에 유모차에 태워서 아이를 데려가면 좋을 법한 장소를 몇 개 떠올려본다. 200일 사진은 집에서 어떻게 찍어볼지 구상해 본다. 제법 챙길 것들이 많다. 그런데 모두 아이에 관한 것이다. 신체와 시간 모두 아이에게 지배당한 자발적 노예 상태임을 다시금 자각한다.


우울함이 파고들기 전에 한번 더 생각을 전환해 본다. 아이를 볼 때마다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나의 아이가 있다는 게 매일 놀랍고 감격스럽다. 아이는 어떤 괴로움도 다 극복할 수 있을 만큼 큰 행복을 준다. 그런데 아이의 존재를 차치하고서도, 엄마가 되면서 나라는 개인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한 면이 있지 않을까?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본다. 상처뿐인 영광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육아가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면이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진주알 찾기처럼 느릴 수 있겠지만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머리를 굴려본다.


엄마라는 역할을 지우고 이전의 나보다 나아진 부분을 찬찬히 생각해 본다. 사실 어떻게 보면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엄마가 되면서 불가피하게 변해버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상처뿐인 영광 혹은 정신승리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인 것은 분명하다. 차분히 떠올리다 보니 가지치기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신체나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사고나 관심사의 확장 등 생각보다 다양하다. 또한 이것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눈물 흘리던 예전보다 백배 낫기에 의식적으로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티끌 모아 태산처럼 작은 성장 조각들이 작은 탑을 이룬다. 휘발되기 전에 기록을 해서 다시금 긍정적인 기운을 마음속에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오랜만에 시작해봐야겠다 싶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와서 던져진 세상에 막막한 나머지 다시 알껍질로 향하지 않듯, 네오가 알약을 먹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듯 나도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도 다시 재탄생했다. 새로이 맞이한 국면의 세상은 예전보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훨씬 많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성장하게 된다. 엄마 나 자신의 크고 작은 성장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