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 없는 약속
부산에서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고향인 부산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 오빠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자리 잡고 있었고, 자연스레 장남인 오빠의 거취에 따라 우리 가족은 부산을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도 이제 부산 사투리도 벗어버리고 세련된 서울 여자가 될 거야'
어린 마음에 서울에서 가장 핫하다는 강남에 살게 된 것이 그때는 좋았다.
그렇게 강남에서 살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강남에 살고 있고 이제는 강남이 내 고향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내 고향 같았던 강남을 떠나려고 준비한다.
더 이상 이 곳에 있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혼하고 싱글로 새 삶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좀 더 자유롭고 싶었다.
서울시 지도를 펼쳐 보았다.
내가 앞으로 어디서 살지?
서울의 한 중앙에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산타워를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면 이상한 걸까? 언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20년을 서울에 살면서 정작 남산타워 한 번을 안 가본 것이다.
그런데 난 이제 멀지도 않은 남산타워를 갈 수 없다.
나에겐 남산타워는 그리움의 아이콘 같다.
작년 아들이 남산타워로 초등학교 현장학습을 다녀오고 나에게,
"엄마, 오늘 남산타워 진짜 재미있었는데 다 못 본 게 있어. 꼭 나 다시 남산타워 가고 싶은데 언제 데리고 갈 거야?"
"엄마도 안 가봤는데... 방학하면 가 보자!"
"진짜? 엄마는 나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이 대화가 아들이랑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이다.
아들이 아빠에게 가고 나서 난 일 년이 넘게 아직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면접교섭을 요청해도 아이 아빠 측은 아들이 거부한다며 거절했다.
아들이랑 한 약속인데 언제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기약 없다.
아들이 나를 가이드해주기로 했으니 난 남산타워를 절대로 먼저 가면 안 될 거 같다.
아들이 나에게 잘난 척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아이들을 인솔하다 보면 아이들 하나하나 보고 싶은 것을 다 채워줄 수 없었을 터이다. 아들은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다시 가고 싶다고 했을까? 그때 물어라도 볼 걸...
강남에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남산타워였는데 가기 전에 학원이라도 빼서 그냥 같이 한번 가 볼걸... 아쉽고 안타깝고 후회스럽고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다.
난 새 보금자리로 남산타워가 가장 잘 보이는 집을 선택했다.
그냥 바라만 봐도 아들과의 기약 없는 약속의 날이 바로 다가올 거 같은 기분이랄까?
언젠가 아들을 만나게 된다면 아들도 남산타워가 보이는 이 곳을 좋아할 거 같다. 서울에서 비싸다는 강남보다도 남산타워가 보이는 이 곳이 나에겐 훨씬 더 가치 있다.
남산타워를 보면 이제는 아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봐라만 봐도 배부르고 기분 좋아지는 아들이었는데 남산타워를 보면 그런 아들을 보는 것만 같아서 내 기분도 좋아진다.
사람들은 이제 나에게 '꽃길만 걸어'라고 한다.
그 꽃길 속에 남산타워가 항상 동행해 갈 거 같다. 나도 봐라만 보지 말고 빨리 남산타워에 가 보고 싶다.
365일 언제나 변함없는 그 모습으로 항상 마주하게 될 남산타워...
'우리 아들하고 갈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줘! 내가 매일 지켜볼게'
아들을 만나게 될 그 날이 더욱 기대된다.
(photo by 신유지 / 함께 작가 공부한 유지 씨의 멋진 남산타워 사진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