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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름 Nov 01. 2023

글쓰기, 그까짓 것 대충


깜빡깜박.

하얀 여백에 검은 커서가 깜빡깜빡 거린다.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기를 몇 분, 한두 단어 썼다 지웠다를 몇 번,

그래도 한 문장을 겨우 썼나 싶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지우기를 여러 번…

다시 하얀 여백에 검은 커서가 깜빡깜빡 거린다.

외로워보인다.


브런치스토리 작가에 지원해서 합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는데, 언제까지 저놈의 커서를 혼자 둘 것인가. 책 내서 인세도 두둑히 받아야 하고, 강연해서 인기도 좀 끌어야 하는데 나 지금 갈 길이 구만리인데 언제까지 저놈의 커서는 저 자리를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글 좀 잘 쓰는 사람이 되어 하고 싶은 것, 해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저 놈의 깜빡거리는 커서만 보면 블랙홀에 빠진 듯 아득해진다.

오늘도 틀렸다.




완벽주의자에게 시작은 언제나 어렵다. 무슨 일이든 ‘시작-연습-실패-연습-실패… 성공’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완벽주의인 나에게는 시작조차 없고 연습-실패의 과정은 생략이며 오직 ‘성공’만이 내 눈앞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 김영하 작가가 된 것 마냥 쉽게 읽히면서도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재미있으면서도 눈물을 짓게 만드는 그런 글들을 줄줄 써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쓰는 즉시 막 책으로도 출간까지 되는 그런 상태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될 일은 만무하지 않은가.

지난여름 다시(몇 번째 ‘다시’인지는 셀 수가 없다)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나란 완벽주의자는 또 바로 시작하지 못한다. 시작에 걸맞은 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장비가 없어서 시작을 못한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3년 전에도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며 남편에게 노트북을 생일 선물로 받아내었는데 예상 가능하다시피 블로그에 몇 자, 한글 파일에 몇 자 적어놓고 어딘가에 두었더니 노트북이 굴러 굴러 아들의 화상영어 수업과 마크, 브롤(마인크래프트와 브롤스타즈) 게임의 용도로 쓰였고 아들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나만의 '새 장비’가 필요했다. 나만의 '새 장비’만 있으면 머릿속에 동동 떠다니는 글자들이 모여 모여 근사한 글이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때마침 내 생일이 가까이에 있었고-두 달 전쯤은 가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요즘에는 글을 노트북으로 쓰는 게 아니고 아이패드로 쓴다더라며 나에게 아이패드가 꼭 필요하다고 남편한테 어필을 한 후 선구입 후통보로 아이패드와 키보드 케이스, 아이펜슬까지 풀세트를 생일선물로 받아내었다. 남편은 ‘이번엔 아이패드냐’고 한마디 거들먹거릴 만도 했지만 여느 때와 같이 별말 없이 그렇게 필요한거면 잘 샀다고 따뜻한 응원과 묵직한 믿음을 보내주었다. (그렇다. 난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나의 새 아이패드는 애플 마크를 뽐내는 새하얀 키보드 케이스를 입고 책장에 꽂힌 후 읽다 만 책들 사이에 끼여 전혀 위화감 없이 마치 우리 집 벽지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끔은 나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며 4개월이 지났다.

남편의 주 스킬인 따뜻한 응원과 묵직한 믿음은 의외로 나를 참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 불편한 마음은 결국 행동하게 만들 때가 있다. 엄마한테 문제집을 산다고 하고 돈을 받아놓고는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샀는데 엄마가 거짓말임을 다 알고서도 아무 말도 안 할 때, 그래서 무언가를 깨우치고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이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하지 못하셨지만 상상을 해보자면 그런 마음일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스킬을 내 아이에게도 써먹자!)


글쓰기를 부탁해! 새하얀 나의 아이패드야.


요 며칠 마음이 불편하여 죄 없는 새하얀 아이패드를 가자미눈으로 째려보다가 4개월 만에 두 번째로 아이패드를 열어보았다. 여러 번의 검색 끝에 폴라리스 오피스 앱 설치 후 한글 새 문서를 열었고 ‘뭐라도 써보자, 막 써보자, 되든 안 되든 써보자’ 검은 ‘커서 깜빡임’ 공포증을 이겨내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지금 가장 잘하고 싶은 글쓰기 분야에서 대충 끼적여 뭐라도 완성이 되면 왠지 완벽주의를 타파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글쓰기에서 완벽주의를 탈피하면 다른 모든 것에도 완벽이 아닌 완성에 방점을 두고 행동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대충 막 써보겠다는 글을 7일째 썼다 지웠다 퇴고하는 중이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쓰다 보면 시간은 점차 줄어들겠지.


일단 써보자. 그까짓 것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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