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닌 나를 발견하는 방법
나는 일기 쓰는 게 좋았다. 아 초등학교 때 매일 숙제처럼 쓰던 일기장은 모두가 그렇듯이 싫었다. 행복한 날만 적던 내 일기장이 따로 있었다. 얼마 전 정리하다가 찾았는데, 어째서인지 숙제로 내던 일기장만 남아있더라.
내 일기장이 진짜로 내 키보다 크진 않다.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다. 굳이 표현해 본 이유는 일기 속의 일상의 나보다 더 대단한 존재 같아서? 음 일기가 자서전 같다는 말은 아니다. 감정을 모아 일기장에 버리기도 하고, 하루쯤 그냥 자버리기도 하고, 하릴없이 그날의 일과를 나열하기도 한다. 종잇장은 이야기를 담고 그 속에서 발견한 건 나 아닌 나, 또 다른 나다.
요새는 유튜브도 발달하고 메타버스도 대중화되어서 그런지 가상 세계 속 다른 자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싫어하는 나를 잠시 버리고 오밀조밀 만들어 형상화한 미디어 속 나 같은 것. 일기장 속의 나는 그랬다. 작고 작은 나 대신 종이와 연필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
유난히도 소심하고 걱정 많은 초등학생이던 나는, 집에서만큼은 수다쟁이였다. 학교와 학원에서 있었던 작은 조각을 말로 이어 붙이는 걸 정말 좋아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도 일기에 적을 말이 또 있었다. 하루 일과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일기와 나의 대화였다. 감정이나 사건을 와글와글 나열하는 장도 있고 나와 이야기하거나 일기와 이야기하는 장도 있다. 어느새 부끄럼 많은 나는 잃어버리고 낭창한 내가 남았다. 그래도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동심은 일기에게 말을 거는 나에 기반한다. 이렇게 일기에 말을 걸 수 있었던 건 어릴 적 읽었던 <안네의 일기> 때문일까.
일기를 읽으면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종이 냄새, 오래된 기억 냄새. 그리고 왜곡된 행복감의 향수. 느닷없이 든 생각인데, 나는 마녀가 꿈이었다. 동시에 용사가 꿈이었다. 이게 무슨 로맨스 판타지 소설 같은 말인가 싶다. 그만큼 종이와 연필은 무궁무진한 수단이었단 것. 어쩌면 그때의 일기장은 소설일 수도 있고 드라마일 수도 있고.
원래 내 일기장은 절대 방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고 앞장을 읽어도 안 된다. 그렇지만 기화된 기억과 지나간 시간과 함께라면 어떤 책보다 재미있는 게 각자의 일기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