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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하 May 25. 2022

무겁게 돌아가는 시곗바늘

시간은 역사와 문명과 과학과, 인간을 안고 걷는다

  명시력은 대한제국기 역서이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이끈 광무개혁의 정신인 구본 신참은 당시의 시간관에도 그대로 작용했다.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뜻의 구본 신참은 음력을 토대로 양력을 덧붙였다. 우리의 근대적 시간관은 외부의 것을 수용하면서도 우리 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자격루는 과학기술을 ‘경천애민’이라는 인문 정신으로 발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한 자격루는 백성을, 즉 인류를 위한 발명이었다. 사람이 시간을 알리니 오차의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는 새로운 물시계, 자동시보장치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백성들이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하기 위함이다. 자격루가 울리면 의금부에서 종루의 거리에 위치한 북과 징을 쳐 못 듣는 백성이 없게 했다. 이후 일제에 의해 보신각의 타종이 금지되었는데, 광복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눈과 귀로 전달했으며 지금은 제야의 종으로서 온 국민이 새해를 함께 맞아 하나가 된 기분을 느낀다.


  앙부일구와 자격루, 계속해서 형식을 발전시키던 혼천시계, 서양 문물을 수용한 천문시계인 통천의 등 시계의 형태와 원리는 끊임없이 발달해왔다. 이 시기에 서양 과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많아졌다. 우리는 서양의 것을 수용한 근대의 시계를 통해 근대화 및 개화라는 당대 사회를 발견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어떻게 시간을 알려야 했는지, 당시 사람들이 순환적 시간관과 직선적 시간관, 나선형 시간관 등을 왜 주장했는지 '시간 도구'들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은 단순히 우리 생활에서의 ‘수직선’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의 이해나 민족의 정체성 존속과도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각자만의 시간관을 정립하거나, 사회적으로는 어떤 인문 정신을 발휘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거시적으로는 시대, 문명, 문화와 함께 발전하는 것이 시간이기에 역사와 함께 분석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시간은 ‘수직선’이 아니라 평면 좌표, 더 나아가 지금의 3차원을 벗어난 ‘4차원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투시경이 된다.





  시간은 점차 넓어진다. 또한 점차 빨라진다. 예컨대 메타버스는 온라인상의 가상공간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없앤 기술 발전의 상징이고 우리의 시공간을 확장했다. 노동 시간을 늘린 주범은 전구이기도 하다. 낮에서 밤까지 노동 시간을 확장했다. 시간의 순행적 성격을 바꾼 것은 ‘서사’이다. 서사문학에서부터 영화나 드라마 등의 콘텐츠까지, ‘스토리’는 시간을 뒤섞는다.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며 병렬적으로 사건을 서술하기도 한다. 시간을 여행하기도 한다. 시간의 방향을 다양화했다. 속도 경쟁이 가속되고 세상은 경주라도 하듯 더 빠르게 발전한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난 변화는 헤아릴 수 없다. 세상을 담는 방식이 흑백에서 컬러가 된 만큼, 우리의 시민의식도 많이 성장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곤 한다. 과연 우리는 사회의 뒤꽁무니에라도 닿을 수 있을까? 시간은 점점 빠르게 지나간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들 한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현대로 올수록 큼직한 사건들의 간격이 좁아지고 변화 속도가 빨라진다. 다만 우리는 시간이 있어야 변화를 가늠한다. 혹은 변화가 있어야 시간의 존재를 포착한다.





  시간은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인간이 발명한 인위적인 개념이다. 이 추상적 개념은 시계로 형상화된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다면적이며 인간적이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시간의 노예가 되었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삶을 조각내어 욱여넣는 것은 근대 산업사회의 시계 발달에 의한 것이다. 시간 엄수는 비즈니스의 영혼이었으며, 시간을 지키고 아끼는 것이 사회생활의 원칙이 되었다. 시간을 아껴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업무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의 굴레 안에서만 생활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근대 사회의 기계화된 인간을 투영한다.


  지금의 도시는 어떠한가? 도시에서 시간은 도망가버렸다. 인간이 발명한 본질적 개념에서 벗어난, 규칙적이고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바늘 속에 갇혀버렸다. 본질적 개념은 인간이 필요로 발명한 측정 단위이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질화되어버린 시간에 스스로 구속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불로불사와 영원은 인간의 관심 범위에서 벗어났다. 자본이 세계의 구동 원리가 되었고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이 도망간 도시에서 살고 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의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언제나 ‘빨리빨리!’를 외치는 지금은 논-스톱 사회다. 말 그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하루 배송, 로켓 배송, 총알배송··· 등 이런 다양한 신어들의 생산은 이 사회를 그대로 보여준다. 유유자적한 ‘무위자연’을 즐기던 풍류 정신의 선비들은 더 이상 없다. 과거 느릿느릿한 진행의 원천은 공동체 생활이었다. 세대가 계속해 이어질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 아래 느림의 미학이 가능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개인의식에 빠져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사고와 인식의 당연한 변화다. 시간은 자산이고 속도 경쟁이 시작된 지 오래다. 시간이 부족하니 이제 시공간의 제약을 깨고 AI 시대에 도약했다. 언제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AI 시대는 속도 경쟁을 더 가속할 것이다.


  빠른 속도를 추구하다 보니 ‘이행단계’가 사라졌다. 준비운동 혹은 기다림이라는 단계가 뚝 떨어져 나간 것이다. 또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에서는 중간값이 사라졌다. 디지털은 특히 연속된 물리량이 아닌 불연속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연속된 물리량에는 중간값, 즉 ‘공간’이 있다. 이는 기술적 발전의 결과이자 시간 낭비를 막는 방법임은 분명하다. 다만 사유하는 시간과 느림의 미학이, 이 급한 성격의 시대에 설 자리를 빼앗겼다. 니체는 ‘기다림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원천이 솟구쳐 오름을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유는 곧 창조 및 생산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예술 및 자기 인식을 위한 기다림과 집중의 기회가 적어진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기다릴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사용하고 시간의 알찬 활용은 곧 자본으로 이어진다. 세상의 최고 가치가 자본이 되었고, 재산 수준이 암묵적인 계급이 되기도 한다. 또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공간의 가치가 재설정되었다. 즉 온라인상의 시공간이 대중화되며 새로운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일상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변화하고 있는 시대 및 시간과 함께 주체적인 시간관을 정립하는 것이 어떨까. 이를 위해서는 과거 학자들의 시간관 및 시간 철학, 그리고 과거의 시계와 역법 등을 통한 시간 인식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이 책에서 추구하는 바와 같이, 철학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에 기반한 비판적 사고로 우리 문명을 인식하고 통찰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적 사고를 통해서는 사회를 통찰하고 문제를 포착하여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참고: 2021. <역사 속의 시간, 시간 속의 역사>. 고석규 저. 느낌이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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