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살아있음을 느끼자.
글은 누구나에게 가장 쉬운 표현 방법이라고들 하지만, 멋진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전부 닿을 수 없이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그들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가는 글은 그의 필체나 문학적 감수성과 더불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글이 아니더라도 멋진 사람들은 항상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부러워만 말고 우리는 이 세상을 감각하자. 온몸으로 꿈틀거리는 살아있음을 느끼자. 살아있음이라는 감각이 우주를 뚫고 나갈 때까지.
우리는 바쁜 일상 탓에 의미를 놓쳐 흘려보낸다. 삶과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을 성공 이후의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미완은 불완전도 아니고 덜한 것도 아니다. 진행되는 과정이자 더 큰 완성으로의 도약이다. 삶은 정지하지 않으며 언제나 운동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데뷔작인 <농담>의 한 부분이다. 주인공 루드비크가 여자친구인 마르케타에게 보낸, 혁명의 낙천성에 관한 농담 한 마디를 적은 그 편지가 불러오는 비극이다. 1948년 체코 공산혁명 직후 혁명적 낙관주의가 강요되던 시대가 배경이다.
살아가는 우리들(‘젊은이’)은 완성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연기’한다. 삶의 완성, 즉 삶의 종착지는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한 완성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다. 도가에서는 ‘도’가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미추, 선악, 빈부격차 등은 어떤 의의도 없는 미미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다. 태초에 인간은 표지판 없는 무수한 갈래의 길에 남겨진다. 우리 사회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들에게 완벽을 요구한다. 가혹한 현실에 자연히 그들은 거짓된 껍데기를 만든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자신의 껍데기로 만들어 숨고 만다.
젊음의 치기는 짧기에 의미가 있다. 완성된 척하는 세상에 엉성함을 주며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에 유동성을 준다. 바퀴는 사각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굴러간다. 젊은이들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젊음이다. 그들이 연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의 탓이지만 도리어 세상은 움직이지 않으려 하지만 젊은이들이 세상을 달리게 한다. 같은 방향의 치기가 지속되는 것은 지루하고 진부하다. 이렇게 짧게 지난 후 그들이 또 멈추려고 하면 다음 세대의 젊음이 세상을 굴린다.
완벽히 완성된 것은 없다. 다 만들어진 것은 흠이나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실체라는 것은 없으니 모든 것은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설령 지금 아름답더라도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 젊음은 미완일까 과정일까. 도리어 생각해보면, 완성된 것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젊음을 살 수 있다. 사무엘 울만은 자신의 시 <청춘(원제;Youth)>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젊음은 한 세대만의 전유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청춘>이라는 시에는 ‘그것은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 상상력의 질, 감정의 활력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깊은 샘의 신선함입니다.’ 라는 부분이 있다.
<농담>에서는 무엇을 바로잡는 일은 망각이 담당한다고 했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바로잡지는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 갈 것이다.’
쿤데라는 작품을 통해 삶이 인간에게 던지는 농담과 그 속의 유머와 아이러니를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라는 물음표를 갖고 본질을 찾으려 한다. 젊음이 세상에 대해 연기하는 데에는 힘이 필요하다. 기존의 형식, 사상, 유행 같은 것들이 그 도구가 된다. 본질적으로는 깊이 있는 사유가 필요하다. 세상을 향한 통찰은 나를 바꾸거나 세상을 바꾼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부분을 포착해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보그 코리아 2020년 9월호에는 순창, 구례, 곡성, 담양에 사시는 100세 전후의 할머니 여덟 분의 한복 화보가 실렸다. 하고 많은 쟁쟁한 모델이 아닌, 여느 시골 할머니를 모델로 선정한 이유는 뭘까? 모델 활동을 하시는 할머니도 아니었다. 그들의 삶을 포착했기 때문이고 그 서사의 가치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키워드는 ‘희망’이었다. 보그에서는 이 콘셉트를 이렇게 소개한다. ‘전 세계 26개국 <보그>가 ‘Hope’란 주제로 9월호(셉템버 이슈!)를 준비하던 차였고, 우리는 ‘희망은 어떤 모습일지’ 추상적인 이미지부터 구체적인 인물까지 여러 후보를 올리며 몇 달을 보내고 있었다. 내게 희망은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보면 새로운 가치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꽃 같은 세월은 아니지만 꽃처럼 피어 계신 할머니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나요?‘ 보그는 화보와 함께, 할머니들과 촬영을 진행하면서 있었던 일들도 소개했다.
예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하셨던 할머니들께 예쁜 한복 화보를 선물하고 싶었다고 한다. 세상의 성공과는 다를지라도 할머니들이 생각하시는 성공과 행복은 아름다웠다. 93세 하남순 할머니는 “시상에 꽃만큼 좋은 게 워디 있어.”라고 하시며 꽃만큼 좋은 건 농사짓고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들 모두 화보 촬영에 너무 기뻐하셨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여서 축하파티를 하기도 하고. 이 넓은 세상에서 나만의 가치를 포착해보자.
우리는 항상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그렇다면 세상을 포착하자. 세상을 통찰하고 세상 속 나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이 말하는 젊음이나 성공한 삶도 좋지만 우리는 가장 먼저 갈증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껍데기 속에 숨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세상의 것을 포착해서 의미를 끌어내자. 모두에게 가치는 다르기에 내 멋대로 세상을 감각하자. 살아있음을 느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