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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matic Oct 27. 2020

<소공녀> 적합한 공간을 찾아 떠나는 여정

Microhabitat(미소(微小) 서식 환경)_적합한 공간을 찾아 떠나는 여정.     


 어둡고 으슥한 기운이 든 미소의 방에는 미소(이솜) 말고도 다른 생물이 숨어산다. 미소가 자리를 비우자 방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한 마리다. 음습한 미소의 방은 바퀴벌레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그러나 그 방은 바퀴벌레가 소유할 수 없는 방이며, 미소도 주인이 아닌 방, 월세를 올릴 것을 알리러 온 방주인의 공간이며, 그 주인조차 자신의 방이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주인의 것이다. 연쇄적인 먹이사슬에서 바퀴벌레는 최하층에 위치해 있다. ‘방’이라는 인간이 만든 견고한 공간에 숨어사는 벌레는 인간의 공간을 침범해왔지만, 그곳에서 서식하기 위해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기에 생존의 구실이 없다. 인간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최약체 바퀴벌레의 생존법이다. 영화의 초반에 위치한 이 장면은 영화 <소공녀>의 위계가 나뉘어 있는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세계를 정립한다. 동시에 영화의 공간과 인물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발적 ‘홈리스(Homeless)'인 미소와 달리 다른 주요 인물들은 영화의 세계에서 그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인물들은 생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 주거공간에서 머물거나 혹은 그 공간을 소유하기 위해 공간(을 둘러싼 사회)에서 요구되는 자신의 기능을 다한다. 그들은 공간에서 존재하기 위해 공간을 둘러싼 사회 구성체에 자신이 해야 할 기능을 다하며 사회 존속에 기여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인물들은 그러한 공간, 사회에서 요구되는 통념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문영(강진아)은 힘들게 들어온 회사에서 고된 노동으로 기능하며 버틸 수 있고, 현정(김국희)은 잘하지 못하는 가사노동을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혼자서 감당해낸다. 문영과 달리 가정을 꾸려낸 다른 인물들에게는 사회의 최소 단위로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요구되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성역할이 드리워져 있다. 대용(이성욱)은 힘들게 아파트를 구해 주거공간을 마련하는 가부장제 아래 전통적인 남성상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록이(최덕문) 역시 부모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한 효(孝)의 덕목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미소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으로 비친다. 인물 정미(김재화) 또한 남편을 떠받드는 전통적으로 선호되던 여성상의 모습을 보이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충실히 기능한다.


그들은 영화의 세계에서 공간이 주어지나 자신들의 공간에서 진정한 행복에 닿아 보이지는 않는다. ‘기능-기여’의 관계로 견고한 영화의 세계에서 기능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 미소는 지인의 집에서 가사노동을 한다. 미소는 할 일을 끝냄과 동시에 그 공간에 머물러 있기에 꺼려지는 존재가 되고, 퇴장을 요구받는다. 정미의 공간에 미소가 들어오게 됐을 때도 영화의 세계는 냉혹함을 내비친다. 미소는 정미의 집에 머무르는 대가로 집안일을 돕고 싶다고 말한다. 미소의 발화는 기능이 엇비슷한 정미네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내몰릴 위협으로 작용하며, 급진적인 카메라 움직임은 가정부 아주머니를 비추며 이를 명확히 드러낸다.



 미소는 다른 인물들의 공간들을 표류하며 본인의 가치관을 유지할 수 없기에 자신이 머무를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자의적인 선택을 내리고 그 공간들을 떠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미소는 다리 아래 추위조차 막지 못할 얇은 텐트로 둘러싸인 공간을 마련한다. 조금은 불안정해 보이는 미소의 서식처는 다양한 공간들을 떠돌다 내린 미소의 자의적인 선택임과 동시에 생존을 위해 기능하는 다수에 의해 정립된 영화의 세계의 압력에 의한 것이다.


민지(조수향)는 자신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공간을 얻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미소는 결코 빚은 지고 싶지 않아 ‘공생’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러한 선택을 내린 미소에게는 ‘공생’이 허락되지 않고, 영화의 초반 다리 위를 걸을 수 있는 삶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리 아래로 내몰리게 된다. 영화의 세계에서 '홈리스(Homeless)'인 미소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은 다리 아래의 보호받지 못한 공간만 허락된다. 그러나 다리 위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소의 공간은 냉혹한 영화의 세계에 분명 실재한다. '미소의 움막'은 생존을 위해 기능하는 세계 너머 다른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여겨볼 수 있는 가치를 드러낸다. 미소는 집을 구하지 못해 텐트에 머물며, 약을 먹지 못할 만큼 자본과 더 멀어졌지만,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취향을 고수하며 현재의 행복에 안주한다. 미소의 공간은 생존이 담보된 안전은 결여되어 보이지만 현재의 행복은 주어질 수 있는 미소에게 적합한 환경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미소의 공간이 빨갛게 온기가 감도는 것은 다행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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