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기 # 02
작업실이 신계 끄트머리인데다 돌아가기 전까지 다 마치지 못할 정도로 일이 바빠서
홍콩섬, 구룡, 하이킹은 꿈도 못 꾸고 작업실 보다 더 끄트머리인 호텔을 얻어 두달째 출퇴근만 반복하는 중이다. (사실 꿈과 환상의 나라는 다녀왔다)
일하고 먹고 자고를 하다하다 너무 지겨울 때 친구와 나는 삼쟁으로 향한다.
끄트머리 작업실보다 더 끄트머리인 호텔을 지나 더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동네.
참고로 더 끄트머리도 많다. 우리가 닿지 못했을 뿐.
너무 호젓해서 적막한 호텔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해안 도로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면 30분, 버스로는 5분 거리에 삼쟁이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뭔가 고요한 시골 마을일 것 같지만
사실 삼쟁은 손바닥만한 동네에 있을 것 다 있는
도시의 바람직한 축소판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내는 호텔이 호젓한 바다 마을에 가깝다.
오리 구이가 유명한 동네답게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대형 오리 모형이,
곧이어 찰리의 초콜릿 공장을 떠올리게 하는 빵공장 'Garden'이 빵냄새를 풍기는 묘한 동네다.
이제 홍콩의 상징고층 아파트를 지나 그 상가에 위치한 우리의 목표, 'Fairwood'가 나타난다.
여유로운 Fairwood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전쟁같은 홍콩 곳곳의 다른 Fairwood와는
너무 다른 비현실적인 풍경에 이끌려 삼쟁에 온다.
다음은 스타벅스다.
빈 자리는 기본이고, 곳곳의 플러그까지, 역시 홍콩에서 보기 힘둔 풍경이 펼쳐지면
여기 앉을까 저기 앉을까 행복한 고민을 사서 하다 커피 한잔 마시고 배 두드린다.
공장 옆 화단의 꽃 모양을 유심히 보고, 고층 아파트 마당을 빌려 바다를 보고 돌아오면 아 이게 행복이구나,
나는 그렇게 지내고 있고 아마 돌아갈 날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다.
오늘도 그렇게 삼쟁에서 여유를 부리고 출근한 작업실에는
산더미 같은 할일과 산더미 같은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밥도 맛있고, 커피도 향기롭더라니.
두번쨰 날 두번째 일기를 쓰다니.
올해는 기운이 좋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