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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열리 Aug 18. 2023

문득, 익숙함을 깨달았을 때

[열리는 삶#004]

이제는 병원까지 가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지를 정확하게 안다.

어떤 버스를 타야 하고, 어떤 신호등이 더 빨리 켜지고, 어디에 전단지를 주시는 분이 계신지도 안다.

1분, 2분을 남겨놓고 도착하도록 시간 계획을 짤 수 있을 만큼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인 것이다.


병원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익숙한 위치에 걸린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병원 도착-


참 차분하게도 생긴 소파 위에 얹히듯이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늘 똑같이 세 번 두드리고, 들어가 꾸벅 인사를 한다.

선생님은 이제 나를 잘 아시고, 어쩌면 내가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들 이상으로 나를 꿰뚫어 보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게 불편하지 않다. 선생님이 말하라고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으시고, 다 내가 말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스스로 꺼내놓은 감정의 타래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 감정을 잘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최대한 괜찮은 사람인 척하려고도 애를 썼다. 병원까지 가서 왜 그런 노력을 했는지, 지금 돌아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편하고, 나는 이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붙이는 많은 설명들을 떼고 문장을 만든다. 사람이, 공간이, 흐름이 내게 모두 익숙하다.


그만큼, 우울도 내게 익숙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 나는 원래 우울하고, 원래 무기력한 사람. 이 정도 하면 원래 지쳐서 그만둬버리는 사람.

이유 없이 무거운 마음에 익숙하고, 오히려 그 무게가 달아날까 염려하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사람. 나를 묶어두는 추에 어쩌면 안도하고 있는 사람.


오늘도 상담에 다녀오며 앞뒤로 딱 들어맞게 일정을 수행하고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고, 동시에 내가 이 묵직한 감정 더미가 편하게 느껴질 만큼 치료의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나만의 커스텀 된 아늑한 우울인 것처럼.


어쩌면 익숙하지 않은 생각들이 불쑥 내게 떠오를 수 있다. 스스로에게 다정한 단어를 내어 주는 흔치 않은 일들이 자주 생겨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너무 익숙해서 아직 다 버리기에는 불안한 나의 우울에 슬쩍 거리감을 둬 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더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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