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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 Aug 27. 2024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




사진: Unsplash의Hoyoun Lee




<너에게 묻는다>는 1994년 발간된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수록된 안도현의 시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현대시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이 간단한 한 줄의 시를 처음 접했던 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이 시를 처음 읽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 역시 크게 한 방을 먹은 느낌이었다. 






‘연탄재’라는 존재에 대한 첫 기억은 내 나이 일곱 살에서 여덟 살이 막 되던 해이다. 나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를 제주도에서 자랐고, 여덟 살이 막 되기 전 서울에 처음 올라왔다. 다 쓰고 살구색이 된 연탄을 본 적은 있었다. 그냥 집 앞 쓰레기통 옆에 쌓여 있었던 다 쓴 연탄 말이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온 그 해 겨울 난, 눈 쌓인 골목길 구석구석에 '연탄재'가 뿌려진 광경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내가 이 시에서 처음 꽂혔던 것은, ‘뜨거운 사람’이라는 단어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뜨거웠던 적이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고, 중학생. 그 어린 나이에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뜨겁고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는, 필요한 만큼만 설렁설렁하는 것이 낮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것보다는 차가운 것을 선호했다고 표현해야 할까.


사람을 사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뜨거운 사람은 부담스러웠다. 모든 일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좀 멀리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 무리가 있는데, 그 무리가 형성된 이유만 봐도 그렇다.  체육시간, 배구 수행 평가를 앞두고 자유롭게 연습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자, 지금부터 20분 동안만 연습하는 시간을 줄게. 대신, 공이 몇 개 부족하니까 같이 돌아가면서 연습하도록 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우르르 달려가 공을 하나씩 집어 들고 운동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혼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공을 잡지 못한 몇 명이 운동장 구석에 남았다. 그 친구들이 내가 아직까지 만나는 친구들 무리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시의  ‘한 번이라도’라는 말에 꽂히기 시작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한 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없었던 걸 어찌 아는 거지. 인생을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뜨거워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차갑게만 살아왔나.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뭐든 그렇게 해왔던 나 자신에게 갑자기 의문이 생긴 것.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단 한 번도 무엇인가에 뜨거운 사람이지 못했던 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온몸을 불태워, 재가 될 만큼 열정을 다하고 그냥 버려지면 어쩌나 싶은 괜한 걱정. 일어나지도 않은 부정적 결과에 대한 선제적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  


그 이유는. 첫째, 나는 긍정적인 결과만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둘째, 무언가 이뤄낼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며. 셋째,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미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어떠한 일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발짝 떨어져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지 않고 대하면, 혹여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처받을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인생의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연탄재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연탄재는 그냥 버려지지 않았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본 놀라운 광경. 꽁꽁 언 얼음 위에 뿌려진 연탄재들. 그들은 온몸을 태운 재가되어. 또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을 뿐, 절대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아직 늦지 않은 내 삶도, 한번은 무언가에 뜨거운 사람이고 싶다. 연탄재가 될지언정, 다른 무언가를 위해 쓰일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지 않은가. 이제라도, 상처받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아직도 준비가 필요한가. 오늘도, 잠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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