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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나 Feb 19. 2024

20240219 폭력으로 얼룩진 학창시절

슬픔의 방문을 읽고 나의 슬픔을 돌아보며

2023년에 읽은 책 중에서 다시 꼭 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책은 <슬픔의 방문>이다. 누구에게나 슬픈 기억이 있지만, 나에게도 쓰라리게 아픈 상처와 가슴 저미는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 쓰라고 하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겪었을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글로 풀어내고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읽고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부럽기도 했다.

나는 고독한 삶을 오롯이 살아가며 다른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고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내 삶은 나라는 인생을 짊어지고 걸어가기에도 늘 벅차다. 나는 달팽이집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달팽이처럼 내 집에 꼭꼭 숨고 싶을 때가 많다.

누군가 나에게 40이 넘으면 이제 부모 탓을 하면 안 돼. 40이 넘으면 자신의 인생에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득불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모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도 내 무의식 속에서 나를 가르치고 지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착한 아이였고 내 입장을 소리쳐 말하지 못한 아이였으니까. 나는 내가 하기 싫어도 꾹 참고 했으며 나 하나 참으면 모두가 편안하다고 생각하며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별난 아이'가 안 되는 것이 인생 목표인 사람처럼 살아갔다.


마치 이 세상 고통과 슬픔은 내 일이 아닌 양 나는 너무나 잘 살고 있고 네가 힘들어하는 그까짓 거!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외치며 이를 악물고 피눈물을 흘리며 버텨내는 삶을 살았다. 마음 한편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으로 견뎠고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무너지거나 멋없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오기와 아집으로 갑옷을 만들고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부러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살아냈다.

약간의 무표정과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감추는 큰 웃음소리가 나의 갑옷이 되어주었다. 어떤 일 앞에서도 견고하고 웃으면서 떨쳐보내며 덤덤하고 무난하면서 쾌활한 성격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유쾌하게 삶의 고통을 털어내며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것이 내가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그까짓 남의 공격으로 생채기를 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손해 보고 싶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척 슬프지 않은 척하는 척척의 삶을 잘 연기해 냈다.

특히 나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해 주기보다는 걱정하고 핀잔주고 비난하고 나보다 더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엄마, 아빠에게 감정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사는 척을 하는 것엔 도가 텄다. 지금 생각하면 딸의 마음을 읽어주고 싶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뭘 물어봐도 '몰라'라고 일관했던 거 같다. 특별히 미주알고주알 하루하루 겪었던 어려움을 말로 풀어내지 않고 켜켜이 쌓아두며 살아갔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부모에게도 멋진 자식이고 싶어서 말이다.


깊은 상처가 되어 아물지 않았던 기억들은 때론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시절엔 어떻게 그런 일을 담담히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 82년생 김지영이 겪었을법한 일들도 있고 성인지 감수성이 무척 낮았던 예전에 학교 교실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의 작태를 잊을 수가 없다. 지금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학교 교사를 할 수 없을 만한 일들도 빈번하게 일어났고, 학생을 사랑해서 때리는 거 같지 않은 수많은 폭행이 난무했다. 그 시절엔 집에 가서 집단으로 기합을 받았던 것도 시험 결과에 따라서 틀린 수대로 손바닥을 맞았던 것도 집에 가선 말하지 않았나 보다. 얼마 전에 아빠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시절 교실에서 만연되어 있던 체벌로 포장된 교사들의 학교 폭력 사례를 이야기했더니 무척 놀라셨다. "왜 그땐 말하지 않았냐?"며 무척 당황해하셨다.


중학교 때는 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선생님들이 꽤 많았다. 얇은 회초리부터 두꺼운 몽둥이까지 각양각색의 매를 볼 수 있는 곳이 학교였다. 집에서도 맞고 안 컸는데 학교에 가면 맞는 아이들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고, 단체 기합으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투명의자'를 하며 도대체 언제 끝나나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의 귀를 만지거나 등을 쓰다듬는 교사도 있었다. 우리는 불쾌하고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나, 왜 그랬는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우리는 무섭고 두려웠던 거 같다. 모두 숨죽이고 부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어린 학생들에 불과했다. 아무도 얼굴 빨간 교사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지금도 늘 그 순간을 생각하면 그 친구에게 무척 미안하다.


나는 특별히 잘못하는 게 없던 말 그대로 모범생이었다. 굳이 학교에서 나를 내세우며 선생님과 척을 져 봤자 학교 생활만 피곤해지니까 하라는 대로 말을 잘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 학교였던 거 같다. 라떼는 지각이나 조퇴, 결석은 1년에 한 번도 안 하는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코피가 나도 머리가 아파도 열이 펄펄 나도 학교에 빠진 기억이 없다. 하다못해 양호실에 가서 누워있어 본 적도 없다. 누가 들으면 그 정도면 건강했던 거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라떼는 운동장 조회를 하던 뜨거운 여름날에 쓰러지는 아이들이 간혹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군대도 아닌데 왜 군대처럼 운동장에서 앞으로 가, 좌로 가, 우로 가를 하며 팔을 흔들며 걷는 훈련을 했는지 모르겠다.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은 공감할지 모르겠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들으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 일들이 참 많았다. 폭력인 줄 모르고 폭력을 행사했던 시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무섭고 엄격하고 체벌이 난무하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복도와 교실 왁스 청소를 수시로 하고 낙엽이 떨어지면 학교 교실 앞을 청소했던 시절이다. 지금 그렇게 하면 부모들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아이들을 청소를 시키면 어떡하냐고 단체로 항의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살면서 슬펐던 기억을 떠올리라고 하면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다. 슬픈 건지 충격적인 건지 화가 나는 건지 모를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 짝꿍이 잘못했다고 나에게 짝꿍 따귀를 때리라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였다. 동생 따귀도 때려본 적이 없고 맞아본 적도 없는데 짝꿍 따귀를 때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지금 생각하면 아동학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살짝 때렸다고 누가 때리랬지, 쓰다듬으랬어?라고 오히려 아무 잘못 없는 내가 욕을 먹어야 했으니, 그 교사는 무슨 생각이었을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한 아이에게 짝꿍 따귀를 때리라고 했으니, 맞는 아이도 수치심이 들었을 것이고 때리는 나는 도대체 무얼 배우겠냔 말이다. 정말 이상하고 이상한 교사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과연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은 피해 아동들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요즘 같았으면, 엄마한테 얘기해서 징계를 받게 할 텐데 예전에는 학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크게 문제화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오히려 아이들이 문제가 있어서 교사가 그렇게 행동했겠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엄마, 아빠와 나의 관계가 편하지만은 않았던 것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 아빠가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르거니와, 문제의 중심에 서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도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잠깐 참고 지나가면 오히려 일이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30년이 넘게 지난 이 시점에도 그때 그 사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걸 보면 나에겐 꽤나 충격적인 기억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가 나를 믿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편하고 믿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혼자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유년기까지는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엄마, 아빠에게 앞 뒤 안 가리고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초등 고학년 10대가 되면 아이도 혼자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도 시시콜콜 엄마, 아빠에게 다 말하지 않았던 거 같다. 아빠가 학교 폭력의 온상이었던 나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며 놀란 걸 보니 말이다.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으니 정말 다행이다. 우리 아이들은 체벌 없는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내가 학교를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조직으로 기억하게 된 것도 학생으로서 겪었던 말도 안 되는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도 수학 문제를 틀린 수대로 손바닥을 때리는 교사가 있었고 조는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화를 내던 교사가 있었고 복도에 가서 서 있으라고 교실 밖으로 내쫓기도 하는 교사가 있었다. 자습 시간에 떠들었다고 나무 몽둥이로 어깨를 때리는 교사도 있었고, 아이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무시 발언을 수시로 하고 소리 지르고 협박하고 윽박지르던 교사가 있었다. 수많은 학교 폭력의 경험을 하면서 아이들도 권력을 가진 사람의 폭력 앞에선 무기력해지는 경험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교사에게 항의하지 못했고 학교에 문제 제기도 하지 못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교사들의 폭언과 폭력과 비난과 무시를 견뎌야 했다. 학교에서 권력자 교사들 앞에서 학생인 우리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그때 그 시절 교사들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변명도 지나친 체벌과 인격 무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답답하고 암울하고 불합리와 불공정 그리고 복종의 요구를 견뎌야 하는 세월로 기억된다. 물론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고 함께 웃고 웃으며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을 지금도 소중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그 시절의 오류들이 지금은 반복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가 성숙하고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조례가 있다는 것에도 감동했다. 아이들의 인권이 짓밟히던 시절에 학교에 다녔던 내 입장에서는 정말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왈가왈부 말이 많지만 인권을 존중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 11년 전 3/31에 먼저 세상을 떠난 중학교 친구가 떠올라서인지 슬픈 일들이 겹치면서 내 생애 충격적이었던 학교 폭력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부디 약하디 약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억압과 폭력이 일상처럼 자행되는 일은 다시는 없길 간절히 소망한다.


(다음에 또... 슬픔의 방문을 만나러 가련다)


#마음일기 #슬픔의방문 #학교폭력 #30년전 #에세이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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