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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Mar 03. 2023

마음의 조각을 나누고 기억하는 일

<애프터 양> 사랑이 깃든 기억이 모여 우리는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영화 <애프터 양>을 보면 한 번도 제대로 발음해보지 않았지만 무엇인지는 신기하게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 같은 류의 따뜻한 그리움이 온다. 내 삶을 한 때 지탱하고 지금은 흔적으로 남은 사람들과 그 순간들이, 양의 기억의 숲처럼 성큼 다가와 우리 마음속에 오래 머물다 간다. 양(Yang)의 눈을 빌려 나의 기억의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생경 하지만 아련한 기억들. 오늘이 무료하고 다양한 자극에 어쩐지 썩 흥미가 가지 않는다면, 조용히 혼자 <애프터 양>을 보면 된다. 텅 빈 것 같던 오늘이 다시 가득해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을 충실하게 책임감 있게 살려고 노력하며 그 속에서 틈틈이 열정과 욕망이 가득한 현재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탐하느라 많은 의식과 시간을 소비한다. 하지만 그 촘촘히 나열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열정과 책임감과 정성을 다하는 일상의 무게 사이에 스며드는 조용한 기억의 파도가 있다. 현실이 잠시 아득해지고 플래시백처럼 나를 당겨가는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살지만 과거를 함께 살고, 한 때의 수수 깨기 같던 내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디어 깨달으며, 결국엔 그것 또한 그땐 몰랐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지 않는가. 나를 잠시 움켜쥐었다가 놓고 가는 슬픔, 그리움, 다시 연결되고 싶다가도 이내 체념하게 되는 과거 속 인물들. 체념 속에서도 다시 용기를 주는 기억들. 오래된 필름을 돌려보는 것 같은 따뜻함과 애틋함이 묻어나는 사람들. 다시 돌아가면 굳이 아무 말하지 않고  잠시 그 눈동자를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 같은 아련함 같은 거. 기억을 매개로 견고히 쌓인 누군가의 마음의 조각들. 그것이 결국엔 나를 구성하는 사랑들이었음을 우리는 종종 깨닫고 다시 잊는다. 마치 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파도처럼. 


<애프터 양>에서 우리가 엿보는 양의 기억은 시각적으로 정교하게 나열되어 있다. 모든 기억이 무작위로 저장되어 있는 클라우드의 모양새가 아닌, 양의 선택적 기억의 조각들이 한 나무를 구성하고, 그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이 모여 행성이 되고, 행성들이 모여 우주가 되는 모양으로 입체적으로 나열된다. 어쩌면 인간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친절하게) 구성된,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만들어낸 한 기억의 우주를,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 다시 들어가 행성을 보고 숲을 발견하고 그중 나무를 고르고 그 속에서 구성하는 파편들을 되짚어본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어쩌면 제공할 수 없는 온전한 기억의 자비를 우리는 양의 메모리를 통해 얻고, 엿보는 기억을 통해서 다시금 양의 우주를 구성하는 무성한 파편의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깃들어있는지 깨닫는다. 


영화 속에서 아빠 역을 맡은 콜린 파렐은 영화 초반에 양이 갑자기 작동을 멈추자 해야 할 일이 추가된 것처럼 귀찮은 기색이 영력 하다. 멋진 아빠이자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그는 한 번도 시간을 들여 제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데, 약간의 절망과 호기심에 양의 메모리 뱅크를 열고 양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다양한 감정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도 우리도 궁금하다. 무엇을 남기고 싶었어, 양?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오랫동안 곱씹는다. 양이 남긴 기억의 조각에 반사되는 나의 기억들이 남기 때문이다. 양은 우리에게 가득 남기고 떠났으니까. 


혼자만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소중한 사람들의 생애를 지켜보며 켜켜이 쌓은 양의 기억들은 우리에게 거울처럼 작용한다. 양의 눈빛에 왜 항상 진한 애정과 슬픔이 서렸는지, 어째서인지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은 따뜻하고 사려 깊었는지, 왜 양은 가끔 멈춰 서서 순간을 기록하듯 잠시 머물렀는지, 그렇게 애정이 서린 눈과 마음이 닿은 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가 남긴 기억의 자비, 메모리뱅크가 양에겐 어쩌면 오랫동안 출구 없는 슬픔으로 남았던 것 같아 슬프면서도, 그 덕분에 우리는 생의 헛헛한 순간들이 따뜻한 햇살 아래 녹는 경험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사랑하는 과정도, 결국엔 한 우주를 만나고 그 우주를 구성하는 무성한 기억의 파편을 탐험하고 그리고 그 속에 나를 조금 떼어내 심고 나오는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경하게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구성체를 좀 더 애정 어리게 들여다보고 돌보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결국 우리가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자리는 누군가의 기억 속이 아닐까. 


우리가 지나가듯 약속을 할 때, 사소한 것이지만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해주고 싶어 결심할 때, 눈을 바라보고 말하다가 잠시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을 때, 적막이 너로 인해 따뜻하기만 하다고 느낄 때, 함께 있기만 해도 내 영혼이 잠시 너의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 때, 왠지 그럴 땐 내 앞의 너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고 나의 마음의 조각을 조금 떼어내서 주게 되는 것 같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렇게 마음은 내어지고 주고받아져서, 상대가 내어준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에서 자리를 잡고 자란다. 내가 나도 모르게 떼어준 내 마음도 상대에게 잘 닿을까. 지금은 잊힌 목소리와 눈빛과 얼굴에서 나온 사랑과 마음을 켜켜이 받아 지금의 내가 있다. 기억들은 따뜻한 그리움이 되어 가까이서 살뜰히 나를 돌본다. 


내 마음의 조각도 당신의 마음에서 당신을 조금 구성하고 돌보고 위로하길 바라면서, 내가 건넨 사랑이 사랑으로 가 닿았길 바라면서, 오늘도 안녕히 따뜻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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