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업
서비스 기획 전 브레인스토밍은 아주 쉬웠다. 내게 필요한 걸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고 만든 영화로 먹고살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0. 대작을 만들 수 있는 사람 되기
1. 대작을 만들 수 있는 팀 꾸리기
2. 배급사
3. 영화관
4. 왓챠/넷플릭스에 영화 배급하기
모든 옵션이 불가능해 보였고 0번에 머물러 고민만 깊어졌다. 고민은 하면 할수록 당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여하튼 내 탓할 시간에 차라리 세상을 탓해보자는 게 내 고민의 끝이었다. 내가 영화로 먹고살지 못하는 이유는 내 영화를 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영화를 팔 수 있는 온라인 스토어를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건 너무 대박적 아이디어라서 누가 먼저 하기 전에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안달이 났다.
이름은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었다. 영화를 올릴 수 있는 필름업. 이보다 더 적확하고 직관적인 이름은 없을 것이다. (자화자찬)
다음 스텝은 사업성 판단하기. 필름업이 서비스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필름업은 필요한 서비스인가? 필요한 서비스라면 왜 없는가? 비슷한 모델이 존재하는가?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가? 지금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몇 번은 퇴고한 말끔한 문장으로 다듬어져 있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1. 학부시절 짧게는 한 학기, 길게는 몇 년이 걸리는 작업들이 학내 상영회용으로만 소비되고 사장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영상 회사 재직 중 만난 전공자들이 말하는 여타 대학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영화를 세상에 소개하기 위해 부가적으로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 -영화제 출품, 배급사와의 미팅, 자체 마케팅- 그리고 이를 지탱할 물리적 금전적 체력은 내겐 없다. 그렇다면 난 작업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인 건가?
2. 능력을 의심하며 학과 생활을 마무리해 갈 즈음 졸업 상영회에서 특별한 일을 겪었다. 내 졸업 작품을 보고, 또 한 번 보고 싶다며 파일을 보내줄 수 있냐는 편지를 받았다. 어떤 분은 GV를 마친 내게 다가와 영화가 좋았다고 말해주고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다. 스스로 느끼기에 조금 모자란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어쩌면 영화는 능력보다 취향에 조금 더 가까워 각자의 관객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3.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상 매체에 돈을 쓰는 행위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세상이다. 넷플릭스와 왓챠 같은 OTT 서비스가 우후죽순 출시되고 있으며 브이로그와 같은 영상들로도 소비/수익창출이 일어나고 있다. BJ, 유투버와 같은 직업이 새로 생겨나기까지 했는데 직업으로서의 영화감독은 왜 아직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걸까? (2019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사상 최고치였던 2019년 한국 영화시장의 규모는 6조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런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1차적으로 개인이 영화를 판매할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 OTT 서비스들은 플랫폼이 판권을 갖고 배급하기 때문에 상영 리스트에 들지 못한 영화들은 배급의 기회가 없다. 유튜브는 디지털 프로슈머(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고객) 플랫폼이긴 하나 수익창출 방식이 영화 제작비 대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용 디지털 프로슈머 플랫폼이 생긴다면 영화감독도 돈 버는 직업이 될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 (!!!) 영화를 통한 지속 가능한 삶. 그렇다 이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뜬구름이 점점 형태를 드러내며 꿈과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