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충직한 개
로크 성인, 1540-50, 나무에 채색과 도금, 스페인 라 리오하 지방에서 제작,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런던
#1.
중세 프랑스, 한 귀족 가문의 아들인 로크는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로마로 가는 순례길을 떠났다. 마침 페스트가 창궐했고 로크는 몸 사리지 않고 병자들을 돌봤다. 그러나 막상 로크가 병에 걸리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쫒아냈다. 외딴 곳에서 혼자 앓고 있을 때 한 개가 와서 빵을 가져다주고 그의 상처를 핥아 주었다. 결국 (모든 가톨릭 성인 이야기가 그렇듯 하느님의 도움으로) 페스트를 이겨낸 그는 로마까지 가는 성지순례를 마치고 이후 페스트 환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많이 일으켰다.
#2.
그는 순례자의 수호성인이다. 걸어서 성지를 찾아가는 사람답게 지팡이를 들고 허리춤엔 가방을 매고 있다. 산티아고 가는 순례길의 작은 성당들엔 로크 성인의 이미지가 넘쳐난다.
그는 또한 페스트 걸린 환자들의 수호성인이다. 환자들을 돌봐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시 병을 겪었기 때문에 어떤 성인보다도 환자의 마음을 잘 이해해 줄 것 같다.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의 공동묘지엔 로크 성인의 이름을 딴 소성당들이 생겼다.
그는 개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성인의 이야기를 봐선 로크가 개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개가 로크를 지켜준 것 같지만. 보은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이니 자길 도와준 개를 이 성인이 지켜줄 것이라는 바람일수도 있다. 얼마전 아마존에서 로크 성인의 이미지를 조각한 작품이 판매 중인 것을 봤는데, 로크 성인이 개를 다정하게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애견인들을 위한 현대의 이미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들은 수호성인보단 수호인간, 즉 밥과 물과 포근한 잠자리와 사랑을 주는 인간이 필요하다.
#3.
이 나무 조각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을 가다보면 지나게 되는 리오하 지방에 있던 조각인데, 순례자의 모습보다는 페스트로 고통받는 로크 성인의 모습에 방점을 찍었다. 비쩍 마른 성인의 몸은 페스트로 인한 상처로 뒤덮였다. 개는 빵을 입에 물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로크의 다리에 생긴 상처를 핥아주고 있다. 로크가 한 손에 들고 있는 역삼각형 물체 역시 피부의 상처와 관련돼 있다. 중세 유럽에서 한센병 환자들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도시나 마을을 지나갈 때 작은 종을 딸랑거리거나 따각따각 소리가 나는 물체를(축구장에서 떠들썩한 응원용 장난감, 혹은 결혼식장 사진가들이 단체사진 찍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쓰는 따가닥 장난감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울려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만 했다. 그럼 사람들은 무서워하며 피하든가, 침을 뱉든가, 동전 몇 닢을 던져 주었다. 페스트와 한센병은 다르다. 그러나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긴다는 점에서 조각가는 로크 성인과 한센병 환자의 모습을 겹쳐 놓은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로크 성인의 모습을 한센병 환자처럼 묘사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수호성인은 라자로 성인이다)
성인의 얼굴은 전형적인 잘생긴 얼굴도, 전형적인 성인의 모습도, 전형적인 고통받는 모습도 아니고 그냥 지금도 스페인 어디 살 것 같은 수염이 덥수룩한 삼십대 남자의 모습이다. 훗날 벨라스케스가 그렸던 대장장이 신의 일꾼들 중 한 명 같은, 이상화되거나 극화되지 않은, 실존하는 모델이 있었을 것 같은 얼굴이다. 훗날 이 조각을 사들인 사람도 왠지 나와 같은 이유로 이 로크 성인에게 끌리지 않았을까, 괜히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