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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Jul 18. 2020

거 조금 덥다고 엄살

눈 풍경화를 좋아하게 된 이유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1863-1923), 눈 내린 부르고스 대성당, 1910, 소로야 미술관, 마드리드


이 글은 2018년 12월에 리스보아 고미술 박물관에서 열렸던 호아킨 소로야 전시 Terra Adentro를 보고 쓴 글이다. 리스보아에서 드물게 밤 늦게까지 더운 날을 겨우 이틀 보내고 나서 엄살 부리는 심정으로 찾아 올린다. 



#1. 

눈 보기가 불가능한 곳으로 이사온 지 7년이다. 그 사이에 눈을 본 건 한국에 12월에 갔을 때, 암스테르담으로 2월에 갔을 때, 그리고 마드리드로 3월에 갔을 때였다. 

일 년의 넉 달은 매서운 겨울인 곳에서 살다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코앞인데 영상 15도인 곳에 살고 있으니 추위 싫어하는 내겐 꽤 행운이다. 그래도 가끔 얼굴 살이 찢어질 것 같은 쨍한 공기, 그걸 피해 들어간 식당에서 먹는 뜨거운 국물, 눈 덮인 풍경이 그립다. 


#2. 

미술관에 갔을 때 눈 내린 풍경이나 겨울 풍경이 나오면 입을 벌리고 본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린 풍경화 중에 겨울 장면이 많다. 19세기 화가들의 풍경화에도 겨울이 종종 주인공이 된다. 

다른 풍경화는 심심하다고 지나쳐도 겨울 풍경화는 유심히 본다. 서울의 겨울이 그리워서일 수도 있고, 온화한 날씨에서 일 년 내내 살다가 괜히 한 번 부려보는 투정 같은 것일 수도 있다. 


#3. 

리스보아의 고미술 박물관에서 호아킨 소로야 특별전을 하고 있다. 소로야 미술관은 마드리드 살 때 애정하던 곳이라 거기 걸려 있는 그림은 거의 다 알고 있어서, 갈까말까 하다가, 새로 확장된 박물관 공간도 볼 겸 다녀왔다. 

호아킨 소로야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화가인데, 화가로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여행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마드리드에서 살았다. 

화가가 살던 집이 지금 미술관이 됐는데, 마드리드 간다는 지인이 있으면 늘 추천하는 장소다. 프라도, 솔 광장 같은 관광 중심지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센터에서 멀지 않고, 고즈넉하고, 그림도 아름답고 그 집 정원도 포근해서, 여길 다녀오면 마드리드에 대한 인상이 확 달라질 거라는 것에 늘 확신을 갖고 추천한다. 

마드리드의 호아킨 소로야 미술관 내부. 집을 미술관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포근한 느낌이 들어 좋다. 



특별전엔 처음 보는 그림이 많았다. 아는 그림을 보면 아는 사람 만난 듯 반갑고, 처음 보는 그림을 보면 특별전이라 이런것도 보는구나 해서 반갑고. 

소로야는 해변의 여인들, 물놀이하는 소년들 등 해변 그림으로 유명한데, 이 전시는 화가가 스페인 곳곳을 여행하며 그린 (바다가 아닌) 풍경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눈 내린 부르고스 대성당 그림 역시 처음 봤다. 어쩌면 대충 봐서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스페인에 눈이 올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풍경화 중 눈 풍경은 드문 편이다. 


#4. 

눈 내린 부르고스를 본 적은 없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때 부르고스에서 하루 묵었으니까 아마 10월초 쯤이었을 것이다. 길을 떠나는 새벽엔 쌀쌀하지만 11시가 넘어가면 햇빛이 뜨겁다. 

순례자들은 도시를 싫어하게 된다. 걷다보면 그렇다. 시골길에 비해 인심도 야박하고 차와 사람이 모두 순례자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부르고스도 순례길 중 꽤 큰 도시기 때문에 역시 도시를 걷는 건 힘들어, 하면서 숙소에 겨우 도착하고, 짐을 풀었다. 

스무살 때 마드리드에서 알고 지낸 한 스페인 수녀님이 부르고스 출신인데, 사람들이 장난으로 부르고스에 볼 게 뭐 있어요? 하면 대성당이 있잖아! 하곤 했다. 그걸 기억해내고 도시 구경에 나섰고 대성당도 확인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과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고딕 양식의 뾰족한 탑, 스페인 고딕 스타일의 세밀한 조각 장식, 금빛 소성당들. 한 독일 친구는 ‘영 적응이 안 되네’라고 했다. 순례길의 낡고 작은 성당들을 보다가 부르고스 대성당을 보니 갑자기 화려하고 웅장해서 그렇다는 얘기였다. 

작은 강 옆의 공원, 줄지어 다듬어진 플라타너스, 한가로이 앉아 있는 노인분들, 이런 한가한 분위기를 압도하는 화려한 고딕 성당. 이게 부르고스에 대한 나의 인상이었다. 

소로야의 작품과 같은 위치에서 본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 대성당의 웅장한 정면도 화려한 금빛 실내도 아닌, 뒷골목에서 본 눈덮인 대성당을 보자니, 눈도 그립고 부르고스도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또 스물스물 일어난다. 

이건 뭐, 맨날 어디 가보고 싶은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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