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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Jul 22. 2020

n잡러의 수호성인

성 히에로니무스 + 뒤러

알베르트 뒤러, 히에로니무스 성인, 1521, 국립 고미술 박물관, 리스보아




#1. 

난 직업이 여러 개다. 낮엔 회사 다니고 밤엔 다른 일을 하는 식의 밀도 높은 식이 아니라, 삶의 밀도는 매우 낮되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생활비 될만한 것을 하다보니 직업이 여러 개인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중 하나가 번역인데, 내가 했던 일 중 가장 노동 강도가 높으면서도 보수는 가장 적은 일이다. 원문의 내용을 완벽히 파악하면서 그걸 읽기 좋은 혹은 듣기 좋은 한국어로 옮겨놓아야 한다는 무게 때문에, 그냥 내 글을 쓰는 것보다 고달프다.

외국어-모국어 번역도 힘든데 나이 들어서 배운 외국어에서 다른 외국어로 번역을 해서 그 책이 지난 몇 세기 동안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였던 번역가가 있다. 번역만 하고 살지도 않았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비서이기도 했고 명상가이면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서의 능력을 갖추기까지 했다. 바로 히에로니무스 성인이다. 


#2. 

히에로니무스, 제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등으로 불리는 사람은 4세기 중반, 스트리돈(현재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고 로마로 유학을 가서 이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잠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고 시리아의 사막으로 가 금욕적인 삶을 사는데, 이 때 (역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다. 

로마로 돌아가 교황의 비서로 일하기도 하다가 다시 광야의 금욕적인 생활로 돌아간 그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다. 

라틴어 번역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본이 가장 넓게 퍼지고 교회 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번역가의 수호성인이다. 


#3. 

독일의 르네상스 화가 알베르트 뒤러는 1520-21년에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지방을 여행한다. 여행 중 안트베르펜에서 무려 93세의 노인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엔 그런 고령자가 매우 드물뿐더러 그 나이로 믿기지 않는 건강한 모습, 풍성하고 긴 흰 수염에 반해 그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노인의 모습이 히에로니무스의 모델로 적당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책상에 앉아 명상에 잠긴 성인의 모습으로 남겨 놓는다. 


화가들이 히에로니무스 성인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사막에서 헐벗고 고행하며 기도하거나, 혹은 발을 치료해주고 나서 길들인 사자와 함께 앉아 있기도 한다. 그가 살았던 시절엔 추기경이라는 직책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중세 이후 사람들이 보기에 교황의 비서라면 당연히 추기경이었을테니, 성인은 추기경의 옷을 입고 있거나 추기경이 쓰는 납작하고 붉은 모자와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뒤러는 히에로니무스를 생각 많은 학자로 묘사했다. 펼쳐놓은 책과 독서대 밑의 책, 잉크병에 담긴 깃펜, 한 손으로 메멘토 모리의 상징 해골을 가리키고 한 손은 머리를 괸(명상, 생각 중이라는 표현) 모습으로. 자신을 손으로 일하는 수공예가가 아니라 이성으로 생각하고 그를 그림으로 옮기는 아티스트라고 여겼던 뒤러다운 선택이다. 


#4. 

뒤러가 준비용으로 스케치한 작품은 빈과 베를린에, 유화로 완성된 작품은 리스보아에 있다. 준비용 스케치도 꼼꼼하기 그지없는 것이, 너무나 뒤러답다. 



알베르트 뒤러, 히에로니무스 성인 준비용 스케치, 1521, 알베르티나 미술관,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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