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없는 외손녀는 차 안에서 그만...
2025년 3월 23일 새벽 2시 36분 외할머니께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설을 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상사고로 인해 대퇴부 뼈가 골절되어 수술을 받으셨다.
그 후 요양병원에 두 달간 입원해 있던 중, 결국 회복하지 못하시고 합병증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1923년생, 100년이 넘게 사셨으니 여한이 없으셨을까?
할머니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얼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셨을까?
천국이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되길, 이젠 아무 고통 없이 평안하시기를 바라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던 그날, 나는 가족여행 중이었다. 행선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전날 엄마로부터 할머니께서 한차례 고비를 넘기셨다는 것을 들었지만 여행에 들뜬 아이들의 원망이 듣기 싫어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일주일만 기다려달라"라고 전해달라 철없는 소리를 했다.
할머니는 나의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이런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싸가지 없는 외손녀를 말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외삼촌과 이모, 그리고 사촌들이 와 계셨다. 우리는 먼저 영정 앞으로가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양손으로 브이를 하며 인자한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음식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따금 불려 가 예배를 드렸다.
입관식 되었다. 할머니의 마지막얼굴을 보기 위해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영안실을 가득 채웠다. 영안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넓고 반듯한 이마가 나의 이마와 닮은 듯했다.
'나 할머니 이마도 닮았네?' 낮은 콧대뿐만 아니라 이마도 닮았다니 참 많은 걸 물려주신 것 같다.
새삼 할머니의 키가 커 보였다. 사명을 다한 영웅처럼...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영안실 안을 가득 채우는 따스함. 그건 아마, 마지막으로 나에게 건네는 할머니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울고 있는 엄마와 외삼촌, 이모들을 바라보며 먼 훗날 나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할머니의 상을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할머니와의 추억들이 하나 둘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추억들이 어떤 벽을 부숴버렸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 마을에 살고 계셨다. 그 인연은 일제강점기 수리조합 사업으로 비롯되었다.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면서 할아버지의 고향이 수몰되었다. 할아버지 가족은 '새롭게 생긴 마을'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즈음 할머니의 가족도 멀리 다른 군에서 이 마을로 오셨다. 처녀 쩍 할머니는 실을 만드는 공장(제사공장)에 다니셨다고 한다. 언젠가 엄마에게 "할머니 닮아서 우리가 못생겼잖아!"라며 투정을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뭔 소리야 할머니는 자기가 처녀 적에 동네에서 봄에 피는 복사꽃 같이 이쁘다고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시던데..."라며 말하셨다. 그 말에 우리는 웃고 말았다.
한동네 살던 처녀 총각이 혼기가 되자 그 시절의 결혼방식 대로 각자의 아버지의 뜻대로 사돈을 맺게 되셨다. 그렇게 열아홉 동갑내기 장남장녀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결혼 후 팬티가 한 장 밖에 없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할머니는 삼남삼녀를 낳으셨다. 그러다 광복을 맞이하고 6.25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인근 마을로 이사 가셨다. 할머니는 동네 아주머니와 기찻길을 따라 군산까지 걸어가 젓갈을 떼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젓갈을 파시는 일을 하셨다. 보따리 장사도 하셨다. 어느 날 할머니의 붙어버린 발가락을 보고 살짝 놀란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을 걸어 발가락이 굳고 단단해져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후 할머니는 작은 점빵을 여셨다. 세월이 지나 자식들이 출가를 하고 손자 손녀들이 하나 둘 태어나기 시작했다. 어릴 때 할머니의 점빵 앞에서 찍은 언니와 사촌언니의 사진을 보며
'할머니의 점빵이 지금까지 있었더라면 과자를 공짜로 먹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나와 할머니와 이야기는 무궁무진한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몇 가지 정리해 본다.
그때 할아버지는 상여를 만드시는 일을 하셨었다. 어릴 때 할머니댁에 맡겨진 적이 많아 자연스럽게 상여 만드는 일을 도와 드렸는다. 우리의 일은 종이꽃을 펴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상여틀을 짜는 망치소리가 들리면 조금 짜증 나기도 했었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꽃을 펴야 할까?
할머니는 얇은 하얀 종이 네 장을 한 번에 치마 주름을 잡듯 접었다 접은 종이의 가운데를 가는 철사로 묶는다. 상여에 꽂기 위해 철사를 길거 남겨 둔다. 종이 양끝을 가위로 여러 개의 집을 내거나 둥글게 모서리를 잘라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부채처럼 펼쳐 한 장씩 들어 올려 바짝 세운다. 종이는 그렇게 꽃잎이 되고 마지막 한 장은 꽃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반드시 끝까지 종이를 세워야 예쁜 꽃이 완성되었다. 꽃이 예쁘게 펴지면 나는 뿌듯함 느꼈다. 어느새 우리가 만든 종이 종이꽃들로 방은 한가득이 되었다. 꽃을 빨간색, 노란색으로 물들이기 했는데 그런 작업은 할머니가 하셨다. 국민학교 운동회 때 소고춤을 추었는데 머리에 꾸미는 용도의 빨간 꽃을 달아야 했다. 나는 이 상여꽃을 달았었다. 하지만 진한 분홍의 색의 아이들의 것과 달리 나의 꽃은 진홍빛이었다. 할머니와의 기억들은 이 종이꽃만큼이나 수북하다.
어릴 때 감나무 가지 사이에 목이 걸려 소리도 내지 못하던 나를 구해주신 일, 할머니의 돈을 훔쳤다 들켜 혼난 일, 소풍 때 막내에게 용돈을 주러 가셨는데 선생님에게 동생이름을 '점례'라고 잘못 말씀하신 일, 할머니 냉장고 안에 쿨피스를 다 먹고 몰래 물을 채워 놓은 일, 할머니 집 문을 잠가 버려 무서워 집으로 도망간 일, 자주 할머니가 나의 느릿느릿한 팔자걸음을 흉내 내던 일, 그리고 할머니가 자주 끓여주던 국수가 생각났다.
스무 살 여름 방학 때 나는 할머니집에서 지냈었다. 일종의 도피였다. 할머니는 항상 내 밥그릇에 검정콩밥을 가득 담아 주셨다. 그 후 나는 대학을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몇 년 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혼자가 된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치매가 생긴 후 할머니는 변하셨다. 예전의 호랑이 같던 기운은 사라지고 작고 연약해지셨다. 그리고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셨다.
할머니를 모시고 길을 나서면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하셨다.
"문단속했냐? 문단속 꼭 해야 해. 어떤 사람이 쑥 들어와 그래서 내가 왜 그르슈? 했어"
어느새 할머니는 나의 관심 밖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긴 시간 걸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언젠가 고향에 내려가 식탁의자로 쓰고 피아노 의자를 보고 뭔가 생각난 듯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무슨 돈이 있어서 그때 피아노를 샀어?"
"그거 할머니가 사준 거야!
초여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말끔히 치워진 작은 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를 하루 종일 뚱땅거렸다. 세월이 흘러 피아노는 고장 나 버렸고 피아노 의지만 남았다. 나는 피아노를 엄마가 사준 걸로만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 비싼 비아노를 사주셨다니 마음이 조금 이상해졌다. 외손주를 차별만 하시는 줄 았던 할머니, 인사성 없다고 잔소리만 하시던 할머니, 따뜻한 말 한마디 없던 할머니였는데... 할머니의 이런 투박하고 서툰 사랑을 깨닫기에는 나는 그리 영리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 몇 마디에 상처받았고 끝내 죽음을 코 앞에 둔 할머니를 외면했다.
할머니의 사랑은 그날 차 안에서 떠오른 수많은 기억 속에 깊게 물들어 있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거라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 고마워하지도 않았던 아낌없이 주는 사랑, 그 넘치는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주 뒤늦게 알아버린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와의 영원한 헤어진 다는 것,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이별의 슬픔보다 때늦은 나의 사랑고백이었다. 할머니의 사랑은 앞으로도 엄마를 통해 그리고 나를 통해 흘러갈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그런 거니까. 영원한 거니까...
*할아버지의 고향 : 완주군 화산면 1933년 임익수리조합사업으로 인해 마을 수몰되고 경천저수지가 만들어졌다.
*할머니의 고향 : 완주군 삼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