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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준영 Sep 13. 2022

'의전'에 관한 잡담

직장생활 돌아보기, 퇴사 소감문 20

  외국의 국가 원수나 고위 공직자가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정부에서는 공항에 누가 마중을 갈 것인가, 국군 의장대가 사열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또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대비해 상황별 시나리오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결정이나 준비가 적절치 못하면 외교 결례와 같은 말이 나오게 된다. 국가 간 외교 관계에서는 중요한 이슈가 되기도 한다.


의전은 국가, 외교 행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Photo by Mathias Reding on Unsplash)


  '의전'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는 국가 행사나 외교 행사에 국한되는 의미지만 넓게는 사회적으로 서로가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포함한다. 의전은 상대에 대한 예의다. 과한 것도 문제지만, 부족해도 문제가 된다. 당연히 직장에도 의전이 있다. 


  내가 일하던 기관에서는 매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몇 건의 행사를 주관했다. 아무래도 공공기관이다 보니 관련 부처와 유관 기관의 장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사 담당부서에서 늘 챙겨야 할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의전이었다. 주요 내빈들을 위한 별도의 대기실을 준비하고 미리 명단과 차량번호를 파악하고 이들의 차량을 위한 별도의 주차공간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직장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의전을 위해 차출되는 직원이었다. 입사 후 7~8년간은 차량 의전 담당이었다. 행사가 있는 날 아침 일찍 행사장으로 출근해서 주요 내빈들의 차량 정보(차종, 색상, 번호 등)가 적힌 종이 한 장과 경광봉 하나를 들고 VIP 차량 하차 장소라고 미리 안내한 곳으로 나갔다. 행사장에 차 한 대가 진입하려고 하면 차 번호를 스캔하고 미리 정차를 유도하는 일이었다. 봄, 가을에는 그나마 할만했지만, 여름에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경광봉을 흔든 적도 여러 번이다. 


  승진도 하고 부서장이 된 이후에는 의전에서 역할이 조금 바뀌었다. 차량 의전에서 주요 내빈 의전 담당으로 바뀐 것이다. 차량에서 내린 분을 내빈 대기실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로 말이다. 직접 얼굴을 보고 안내를 하는 일은 부서장 급이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래도 이건 실내에서 하면 되는 일이니 차량 의전보다는 덜 힘들었다.(최근에는 코로나로 행사 자체가 없었고, 행사를 해도 의전의 비중은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VIP 영접과 안내는 행사를 하려면 반드시 챙겨야 한다. (Photo by photo mix on Pixabay)


  한 행사의 담당자로 일할 때는 의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고생한 경험도 많다. 기업 임원들이 참여하는 행사였는데 참석 내빈 현황을 업데이트해서 사회자 시나리오에 반영을 했어야 하는데 이걸 놓쳤다. 당연히 사달이 났다. 내빈으로 소개되면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시던 몇몇 회사 임원분들은 멋쩍은 상황이 되었고, 그걸 본 그 회사의 부장, 과장님들이 모두 나에게 항의를 하러 오셨다. 그걸 감당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한 번은 행사를 위해 제작한 통천(대형 현수막)에 한 회사 로고를 빠뜨린 적도 있다. 역시 그날도 뒷수습이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기관의 이름을 걸고 하는 행사에서 의전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외부 손님에 대한 이런 의전은 처음부터 거부감이 없었고 당연하게 느꼈다. 가끔은 존경하는 분들을 눈앞에서 뵐 기회이기도 해서 의전을 하는 게 귀찮거나 하기 싫은 일은 아니었다. 가끔 외부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 오는 경우나 높으신 분을 모시고 온 수행원들이 자신들도 VIP 대접을 받으려고 뻗대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문제는 직장에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의전'이 문제다. 간혹 직장 상사를 과도하게 챙기는 문화를 가진 직장이 있다. 밥때가 되면 상급자를 항상 챙기고 상급자의 선호에 따라 메뉴를 정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식사 비용도 하급자가 책임지는 경우도 있다. 또 상사와 함께 출장을 갈 때 하급자가 자기 차로 픽업을 하고 출장 종료 후 상급자를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곳도 있다. 아랫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윗사람들이 원하는 거 같지도 않다. 서로가 부담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건 의전도 뭣도 아니다.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하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면 그 사람은 딱 거기까지다.


가끔 윗 분들을 모시고 다녀야 하는 직장이 있다. (Photo by why kei on Unsplash)


  다행히 내가 최근까지 모시던 분들 중에는 이런 분들이 없었다. 오히려 같이 밥 먹을 일이 생기면 내 의사를 먼저 물으시는 분도 계셨고, 출장을 갈 때는 상사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자신이 뭘 먹는지 신경 쓰지 말라면서 매일 점심을 샌드위치로 자신의 방에서 해결하는 분도 계셨다. 아랫 사람인 내가 이분들의 보살핌을 받고 직장생활을 한 격이다. 


  직장 내부의 대접 문화, 서열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 사무실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려면 그런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대접을 위해 식당을 고르고 동선을 짜기 위해 아랫사람들이 버리는 시간도 너무 많다.


생산적인 아이디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온다. (Photo by Redd on Unsplash)


  물론 외부는 다르다. 외부 행사나 회의에서 내 상사가 부당한 대접을 받지 않도록 챙기는 건 필요하다. 내가 모시는 상사뿐 아니라 내가 속한 조직의 위상도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조직 내부에서는 망나니(?)였지만 내가 모시던 상사가 외부 행사에 참석하셔야 할 일이 있으면 꼼꼼히 챙겼다.


  잘못 알고 있는 의전인 '대접 문화'가 남아있는 곳도 얼마 후면 이런 분위기가 변할 것이다.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해도 그 집단에 새롭게 합류한 MZ세대들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젊은 직원이 멘토가 되어 시니어 집단을 코칭하는 리버스 멘토링이 대세인데 '대접'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걸로 바꿔보면 어떨까?



  여러분께 드리는 제안이다. 물론 퇴사했다고 이러는 건 아니다.



(표지 Photo by Frederic Köber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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