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으로 구분되어질 수 없는 것.
꽤나 가깝게 지냈던 이 중에,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차츰 느끼고 관계를 정리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던 그녀의 첫인상은 솔직하고 쾌활하고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던 자신의 장점은
"나는 뒤끝이 없어. 그리고 뭐든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였다.
다소 우울할 때도 많고, 긍정적이지만 반면에 걱정도 많은 나에게 없는 장점을 갖춘 그녀는 항상 당당했다. 움츠러든 내 모습에 비해 당당한 그녀의 첫인상은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이후의 만남들이 이어질수록 그녀가 말했던 장점은 나에게는 차츰 불편한 단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애는 유부남이랑 사귀는데, 이런저런 선물도 받고 용돈도 받고... 그런 거 보면 차라리 유부남이랑 연애하는 게 좋은 것 같아."
"넌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네가 해온 일이 정확히 어떤 건진 모르겠는데, 네 앞길엔 별로일 것 같다."
"네 나이가 몇인데 명품 하나 없니? 명품을 네 돈으로 왜 사, 남자들한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돼."
"좀 고급스럽게 화장해. 여자애가 왜 그러고 다니니."
아뿔싸. 그녀의 솔직함은 상대를 배려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한 그대로를 토해내는 수준이었기에 뒤끝이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와 나는 상식의 기준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목표까지 모든 것이 판이했다.
상식 선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른 그 상식은 그녀에게는 일상이었다. 나에게는 부적절한 관계로 입력되어 있는 상식이 그녀에게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이었고,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그녀였다.
청담동 스타일이라며 우쭐대듯 겉모습을 우아하게 포장하고, 누가 선물했는지 모르는 명품백을 항상 들고 나오는 그녀였다. 그녀가 힘쓰는 것은 오롯이 외모 관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기에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나와 다른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과 전혀 다른 방향이었기에 다시는 그녀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 대단하고 화려한 사람들이 있어야 나 자신도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라고. 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처지지 않고 그들과 나란히 할 수 있게 더 잘 치장해야 한다고.
그녀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때마다 나와 결이 다름을 느꼈고, 그 다름 속에서 왠지 모를 울렁거림에 경멸감까지 느껴졌다. 아마 그녀가 감정의 교류가 없는 직장 내 아무개 정도였다면 무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사회생활로 만난 관계가 아니므로, 이러한 다름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아만자 이전의 나의 최대 장점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려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불편해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맞춰주는 것. 상대가 좋으면 나도 괜찮다 여겼기에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무뎠다.
나와 다른 장점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책 보다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여겼다. 그들에 비해 나의 장점은 너무나도 초라했고, 다른 이들의 장점은 내가 갖지 못한 대단한 것들 뿐이었다.
그렇게 점차 겸손을 넘어, 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항상 탓하고 자책하며 한없이 티끌만큼 작아졌다.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껏 구겨진 이면지 같은 모습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암이 찾아왔다.
상대방의 입장을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배려했다고 여겼던 것들이 정말 상대가 원하던 배려였을까?
결단코 아니다.
나는 상대가 원하지도 않았던 배려 그 이상을 행하며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판단했던 친절은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되려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표정에 괜찮다 말하는 것이 때로는 가식적인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을 것이고,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에 서운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한 FM 대로 웃어른 공경하는 듯 과도한 친절과 리액션으로 무장한 모습은 마치 이미지 관리하기에 급급한 광대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솔직하고 쾌활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고,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현명하게 대처하는 주변인들을 보며 항상 감탄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으며 늘 당당했다.
당당해지기 위해 나 또한 외모를 주기적으로 가꾸려 노력했다. 내 외모가 좀 더 온화하고 인상이 부드러워지면 그들과 같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와 모든 면이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족도, 형제도, 친한 친구도 모든 것이 같은 사람은 없다.
다름으로 인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다름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주기도 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흔히 자기소개를 할 때 스스로의 장단점을 나누어 구분 지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점은 곧 누군가에겐 단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단점이라 해도 그 또한 장점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성향이라는 것이 제품의 사용 리뷰처럼 장단점으로 구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함께 해온 관계, 사회에서 만난 관계, 업무적으로 얽힌 관계 등 다르고 다른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파악하고 교류하며 다양한 형태로 소통한다. 다름으로 인해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감정이 우위에 서는 관계들에서는 이와 같은 경우 한쪽이 돌아서게 될 때 인연의 고리는 끊어질 것이다.
나와 그녀의 관계처럼 말이다.
문제는 사회 내에서 업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이다.
나와 죽이 참 잘 맞아 티키타카 케미를 이루며 함께 성과를 이뤄내는 파트너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참 드물다.
오죽하면 "다른 건 다 참아도 사람 때문에 이 일은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도 끊임없이 업무를 공유하고, 함께 프로젝트를 하며 성과를 이뤄내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인들의 숙명이다.
나와는 참 다른 사람과의 업무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남겨왔던가. 그것이 상대의 탓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상대 또한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하는 이상, 그 간극은 좁혀질 수 없다.
일부는 즉흥적으로 혹은 참고 참다, 감정이 앞서는 것을 막지 못해 업무적 소통과 협력을 포기해버린다. 그렇게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되면, 집중력은 향상할 수 있겠으나 스스로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은 흐려질 것이다.
만약 극과 극의 파트너와 함께 일하고 있다면 그와의 다른 성향으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먼저 돌아서기 이전에 생각해보자.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파트너의 성향이 누군가의 업무 능력 향상에는 동기 부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반대 성향의 파트너의 상식 속에서 내 상식이 평가되거나, 다르게 보이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당신과 파트너의 최종적인 목표는 같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기적이건 장기적이건 언젠가는 끝이 존재한다.
그녀와 나(아만자 이전의)는 같은 점이 있었다. 삶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
화려함에 묻혀 그 빛으로 함께 빛나길 원하는 그녀, 주변의 당당한 빛에 주눅 들어 어둠 속으로만 찾아가던 나. 과연 둘 중에 누가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결국은 같다.
스스로 밝아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목표나 방향성, 상식선이 다르다고 해서 상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섣부르다.
그저 서로 결이 다른 것이다. 나의 결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결을 가진 사람과의 억지스러운 관계는 이어나가려고 하지 않게 된다.
이미 주변을 돌아보면 결국 나의 결과 닮은 사람들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나의 결이다.
물론, 많은 이가 기준으로 세우는 도덕적인 부분에서의 옳고 그름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말도 안 된다.'라고 생각되는 도덕적 상식도 어떤 많은 이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도덕적 상식을 옳고 그르다 구분하는 것, 그것 또한 각자 자신의 결에 맡겨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