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i aber Einsam Mar 26. 2020

백번을 양보하여

어제 식당 뒷자리의 한 커플이 얘기를 하는 중에

"백번을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라는 말이 들렸다.


'헉, 저 남자는 변호사인가? 백번이나 양보하는 건 우리 직종밖에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밥을 먹던 다른 직종의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네는 '백번을 양보하여~' 라는 말을 서면에 써?"

"아니, 우리는 한 번도 양보안해."

그렇다. 변호사들은 이렇게나 많이 양보를 하는 것이다.ㅎㅎ


변호사들은 서면(법원에 글로 써서 제출하는 것들을 '서면'이라고 한다)을 작성하는 중에 상대의 주장을 반박할때  "백번을 양보하여 상대의 그 주장이 맞다하더라도 ~~라는 측면에서 타당하지 않습니다."와 같은 문구를 가끔 쓰게 된다. 처음에는 정말 "'백 번을 양보하여'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지. 저게 뭐야. 구태의연하다."라며 다짐 했건만, 일을 하다보면 상대도 많이 쓰고, 나도 그 문구를 쓰면 적절할 것만 같은 상황에 처할때가 있고 나도모르게 뜻하지 않게  "백번(씩)이나" 양보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전 친한 변호사한테 들은 얘기였는데, 상대방이 서면에

"~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원고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같은 내용을 썻더란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이런 말도 정말 어디, 누가 쓰겠는가?


그 밖에도 "~라고 아니할 수 없다.", "~라 하지 못할 바 아니다."와 같은 고어에서나 쓸 법한 말들이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고 그러다보니, 변호사들이 작성하는 서면에도 가끔 등장한다. 가끔은 아침 뉴스 같은 곳에 패널로 나온 분이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라는 말을 잘못 사용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반대의 의미로 말한 것이 되어 웃음이 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인은 구어에서 좀 처럼 쓰지않는 표현이다.   


일반인 의뢰인들이 많이 지적하는 것으로는 "가사~ 한다하더라도"에서의 "가사"를 자꾸 오타인거 같다고 말들을 하는데, 여기서의 가사는 한자의 假使 로서, 만약, 가령과 같은 뜻인데, 이상하게도 서면에서 가령이나 만약을 쓰는 경우는 본 적이 없고, 항상 다들 "가사"라고 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 "백번을 양보"하는 엄청난 일까지도 생기는 것이다. 나도 이중부정이나, 삼척동자 얘기는 차마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백번이나 양보"하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근데,  "우리는 한 번도 양보안해."라고 말하는 다른 직종 사람들의 인정머리 없는 태도를 생각해보면

어쩌다가 수많은 변호사들이 이렇게 백번이나 양보하는 미덕(?)을 갖게 되었는지 통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난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